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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Oct 01. 2020

"내일 죽어도 어제처럼 오늘을 살겠다?"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 영화 "이키루'

"내일 죽어도 어제처럼 오늘을 살겠다?"

- 영화 <이키루, 生きる>, 감독-구로사와 아키라, 1952


왜 바쁘지? 일이 많으니까?? 지난 30년간 왜 바빴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암튼,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30년간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50대 남자. 젊어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하나뿐인 아들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그 아들 부부와 같이 살고 있다. 나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 자신이 위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이 30년간 무엇 때문에 바쁘게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결심한다.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죽음이 당장 눈 앞에 닥친다면 후회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어제와 같이 살게 될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경우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병이 들거나 몸이 쇠약해져 죽음을 맞게 된다. 딱히 몇 살부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언급하거나 접하게 될 기회는 많아진다. 40~50대가 되면서는 주변의 돌연사 얘기를 듣게 되고, 자신도 갑자기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한다. 자기 또래의 지인이 암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장례를 치르거나 참석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60이 되고 70이 되면서 죽음이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님을 더 자주 떠 올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많은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문학작품에서는 구체적으로 죽음이 확정된 상황이 되어서야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나이가 들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는 많아지고 죽음은 자연스럽고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음학에서는 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강조하는 걸까? 평소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만으로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죽음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많은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문학작품에서는 구체적으로 죽음이 확정된 상황이 되어서야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죽음이 코 앞에 닥치게 되면 다만 며칠이라도 아니 몇 시간 만이라도 시간을 더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1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는 몇 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음이 5년 후로 확정되었다면 어떨까? 10년 후라면? 20년, 30년, 40년 후라면? 우리는 시간을 얼마나 더 달라고 하게 될까? 


정말이지 확정된 죽음으로부터 몇 년 더 시간이 주어지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게 될까?      

이렇듯 내가 언제 죽게 될지가 구체적으로 확정되면 왜 시간을 더 달라고 하게 되는 걸까? 혹시 지금과는 좀 더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이지 확정된 죽음으로부터 몇 년 더 시간이 주어지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게 될까?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확정적이다. 젊을수록, 건강할수록 죽음을 떠 올리며 사는 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현재를 좀 더 온전하게 살려면,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일들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수술도 필요 없을 정도의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나서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30년간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지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심하게 된다. 그건 30년간 근무했던 시청의 업무와 관련된 것이었다. 주민들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으나 시청 공무원들의 무관심과 부서 간 책임 떠 넘기기로 방치되었던 공원 만드는 일을 수많은 난관과 위협을 무릅쓰고 해결한다. 그리고 그 공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와타나베의 장례식장에 모인 시청 공무원들은 그의 공로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결국 와타나베의 공로를 인정키로 하고 자신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며 와타나베처럼 시민들을 위해서 진심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다짐까지 하게 된다. 이런 다짐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날 시청 업무의 일상으로 돌아온 그들은 자기 부서로 찾아온 민원인을 또다시 예전처럼 다른 부서로 돌려보낸다.    

  

죽음과의 대비(對比)를 통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가끔은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치지 않는 이상,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는 이상, 자발적으로 삶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30년간 바쁘게 살아왔는데 무엇 때문에 바쁘게 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회고는 흔히 말하듯 먹고살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과도 사뭇 닮아 있다. 하지만 30년간 깨닫지 못한 것을 한 순간에 깨닫게 되는 계기가 꼭 죽음이어야만 할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다만, 죽음과의 대비(比)를 통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가끔은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다. 일본어인 영화 제목 ‘이키루(生きる)’는 우리말로 ‘살다’라는 의미이다. 

오래된 흑백영화지만 추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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