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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Feb 20. 2024

고작 5분을 못기다려서

어쩌면 내 인생 그 자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사는 자취방에 나 대신 살라고 하면 썩 달가워 하지 않겠으나, 나는 내 인생에 대해 그러하듯 그럭저럭 만족하며 사는 편이다. 장마철이면 하수물이 역류하거나 겨울에 변기물 얼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책장이 없는게 좀 아쉬웠으나 근처 가구집 망할 때 떨이로 가져온 두 개와 전직장 이사갈 때 버린다기에 가져온 두 개 덕에 아직은 알라딘 중고서점 드나들 때 다른 걱정이 없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설거지 할 때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계절은 몰라도 겨울엔 큰 곤욕이었다. 커피포트로 끓인 물의 도움도 한계가 있었다. 호주 주방에서 일할 때 하루에도 독거남의 초라한 분량의 설거지 수백배를 해치웠지만 그래도 온수는 펑펑 나오는 그 때가 나았던 것 같다. 수세미질 하고 얼어붙을 것 같은 손가락을 호호 불고, 헹구다 말고 손을 허벅지 사이에 끼워넣는 절차가 본 설거지 이상의 시간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이제 그 겨울도 지나갔나 싶었던 며칠 전, 싱크대 아래 수납공간을 정리하다 두 개의 관과 밸브를 뒤늦게 발견했다. 하나는 찬물, 하나는 뜨거운물이겠거니 했는데 어라? 두 개 다 열려 있었다. 한참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두 개 다 열려있는 상태란 걸 확신하고, 싱크대의 물을 틀어봤다. 여전히 온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밸브가 열려있다는 것을 확신했으므로 계속해서 기다렸다.


 5분 후, 뜨거운 물이 나왔다


 거참, 이제는 끄트머리에 다다른 이 계절 내내 설거지할 때마다 고작 5분을 못 기다려서 쌩쑈를 해왔던 나의 어리석음에 웃을까 울을까 망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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