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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un 14. 2024

들썩거리는 정신 세계

작업 노트 11


24.06.14



이번 주의 정신 상태는 왜인지 들썩거리는 모양새다. 한 번 퇴행에 들어선 이후로, 여즉 이 퇴행 상태가 진자 운동처럼 넘나드는 기분이다. 햇수로는 2년째다. 퇴행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상황인지, 그 정신 현장을 묘사하기란 참 쉽지 않다. 매개를 도와줄 여러 개념들이 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내향화에 힘입어 이러한 정신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애를 쓰고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한다. 어느 날은 난데없이 들썩거리며 몸의 호르몬 체계가 달라졌는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밀하고 사적인 상태를 바깥으로 꺼내는 첫 번째 관문도, 현실로부터의 유리를 자아낸다. 무엇이 균형이고 무엇이 불균형인지의 자각도 훼손된다. 그러니까, 정신의 균형이라고 하는 건 고정되지 않는다. 늘 새롭고, 늘 다시 해야 하고, 늘 처음이다.


 아싸리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이 어긋남과 호응되지 않는 게 바로 가치관이라 부를 만한 행동 체계다. 책을 읽고 작업을 해야 한다는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행위 체계의 틀 안에서, 나의 여러 감정과 사고들이 미끄러지듯 딴 데로 가 있다. 융이 내담자에게 했던 말,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군요'가 상기된다. 책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 외부에 있는 대상에게 호환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통념의 표현으로 '집중하지 않고 있다'.


 내가 불균형의 상태라고 부를 때 증거로 삼고 있는 반응 중 하나는 가치 박탈이다. 사람들을 향한, 언어를 향한, 사고를 향한, 행동을 향한 가치 박탈이 1순위로 나타날 때 지금 내 상태가 불균형이구나를 느낀다. 조절이 정말 쉽지 않다. 내 안의 여러 정신 태도가 충돌한다. 이를 과거에는 정신 속의 악마, 그 악마의 속삭임, 목소리, 파우스트 같은 존재로 '대리'되기도 했다. 나는 근대인답게 그런 방식으로 정신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나의 의식이 정신의 어떤 에너지를 억압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사람들을,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듣게 되면 늘상 갖게 되는 어떠한 감정이지만, 참으로 외롭고 피곤하고 지친다.


 이 감정은 아주아주 오래된 골동품이다. 어제도 한 독서 모임을 다녀왔는데, 그런 인상을 안 받을 수 없었다. 내가 소위 '일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연습, 이 연습을 올해 초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할 만한 일인가 싶다. 이제는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일렁인다. 내 정신에는 가치 투쟁을 무마시키는 에로스의 강한 힘이 있는 반면, 이에 버금가는, 때로는 이보다 더 강한 가치 박탈의 힘이 있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이 둘의 대결에 나는 기진맥진해진다.


 바깥의 인간들은 내 정신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 아이러니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표현하기로 채택한 신체적 행위(말, 글, 비언어, 몸짓, 모든 것)로 나를 획책한다. 지금껏 내가 발달시킨 사회화는 이 구도에서 괴리를 최대한 날 것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남들은 이런 데에 힘을 쓰지 않겠지? 신경을 과도하게 소모시키지 않아도 되려나? 잘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런 부분까지도 공유될 수 있는 언어(그때는 지금의 언어 방식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가 통용되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아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참으로 많은 시간을 썼던 거 같다. 그럼에도 도돌이표다. 그러니까, 아는 게 많아진다는 건 '정서'에 그다지 기발한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리하다. 이 불리함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공감받아본 적이 없는 고독한 감정이다. 그래도 지금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로 이성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관찰을 시도할 뿐이다.


 가치 박탈의 힘. 이것은 부정성의 힘이다. 이 힘으로부터 덜 고통 받아도 되는 인간들의 눈에는 절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 참으로 외로운 힘이다. 이 힘은 아주 강력하고, 또 원초적이라 부를 정도로 뿌리 깊어서 때로 한 인간을 기이하게 돌출시키기도 한다. 형상으로 보면 송곳과도 같은, 망치와도 같은 인간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루다. 한국 출간 책에서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쪽 인간 중 하나로 대표되는 인물은 에밀 시오랑이다. 시오랑을 읽는 독자 중 위로나 위안, 때로는 용기를 느끼는 독자가 태반이라는 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일반화의 오류다. 이 구도는 '독서'라는 행위에 감춰진 어떤 인간 정신 간 관계 맺기의 협정 중 하나다. 독자는 저자에게 거리 두기라는 안전 장치를 보장받는다. 그들은 저자의 정신을 소비함으로써(향유라고 말하는 기만도 가능하다) 자신을 '대신'해서 무언가 치르고 있다는 모종의 해소-정화를 느낀다. 이를 고태적 어휘로 카타르시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개념으로는 불충분하다.


 가치 박탈의 힘은 몇몇 콘텐츠에서 자주 소비될 대상으로 캐릭터화되는 '빌런'들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들의 발화 코드, 정신 구조를 엿볼 수 있게 '기획-설계'된 태도에는 늘 자신의 고독을 세계 그 자체로 과도하게 확장시키려는 데서 발생하는 타자의 불수용이 나타난다. 현실에서는, 이때 주체는 그저 대리인, 하수인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신과 어떤 불평등한 협정 맺기를 하고 말았는지 눈치채지 못한다. 당연히 일반 사람들, 소위 '타인'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들은 당사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려 하는 데 급급하다. 철학이든 인류학이든 꽤 높은 등급의 윤리 가치로 호명되는 '타자'는 놀랍게도 우매한 대중이 아니다. 타자란, 개념 그 자체에 모순이 있는데, 그것은 솎아내기, 구분하기, 레크비츠 표현대로 '단독화-되기'의 전략이 수행된 존재다. 돌려 말하면 그것들이 먹혀들지 않는 무수한 존재는 '타자란 지위'를 얻지 못한다. 즉, 타자란 인식 가능한 조건지워짐을 '허락'받은 존재지, 그렇지 않은 무수한 존재를 겨냥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을 따름이다. 


 이 은폐된 문제가 비로소 현상에 돌출될 때는 역시나 세속화를 거칠 때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책을 내는 학자들, 저자들, 사회의 건강함을 지향하는 목적으로 글을 쓸 때 자주 채택되는 '타자'에 대한 이미지화가 그것이다. 즉 여기에는 낭만성에의 호소하기가 불가피하게 작동되는데, '타자'가 가치화될 때는 그 존재가 나로 하여금 어떤 성숙함, 포용력, 관대함, 차이에의 개방성, 다양성, 융의 표현대로라면 '그릇의 확장'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타자를 필요로 함은, 아무리 감추려고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근대 정신의 강화'다. 이는 고도의 이성 사용자들 입장에서 흐린 눈으로 봐야 하는 현상일진데, 왜냐하면 타자-이방인-소수자-괴물-악마 등의 호명은 그 반대 급부의 현상, 그러니까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대상 존재를 지워버리고, 잔인하게 대하고, 죽이고, 고문하고, 인정하지 않는 인간 정신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이상론을 사실 너무나 사랑한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몇몇 정신의 계통 속에서 보존되는 '앎과 삶의 일체'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정신들의 철학-함을 지향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이상으로 지향될 수밖에 없는 세계를 제시하는 데 그 존재 의의가 존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기에, 선취될 수 있다. 선취될 수 있기에, 예방할 수 있다. 누군가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나타날 때, 한 생명의 '본래성'을, '현존'을, '생명의 가능태'를 훼손하고 침해하고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할 때를 선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맞서 온갖 전략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무해한 부정성의 힘인지를, 고독인지를 어떻게 끌어안고 사냐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먼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이런, 소위 '철학적인' 이야기를 '어제 먹은 점심 어땠어?' 따위의 일상 층위에서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한때 꿈꿨었다. 그러니까 나에겐 너무나 일상인데. 숨 쉬듯 자연스럽고 당연한 건데 세상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상하고 어렵고 다르고 복잡해 보이는 걸 대하는 태도가 늘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마치 본능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거리 두기'가 만연한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을 해나갈지,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노력을 요청받는 게 나의 일상이다. 


 책 속에서는, 남들은 읽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책 속에서는 마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1번으로 나와 있지만, 일상에서는 감추고 숨기고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들을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처럼 유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걸 개인 주체, 당사자의 역량 문제로 따지기도 한다. 남들 신경쓰지 말고, 당당하게, '나답게' 따위의 진정성 문법으로 자책을 요구하기도 한다. 현대가 이런 시대다. 남은 남이니까, 의 기본적이고 당연한 정신 태도가 절대 극복될 수 없는 시대로 모양난다. 


 이성 사용자들을 동료처럼 여기는 나로서는, 이런 관계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포착하고 분화하고 해석할지의 대안들을 하나씩 수집한다. 관점을 달리하면 언어의 용처가 미묘하게 수정되고, 그럼으로써 해석의 여지가 늘어난다.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다. 이런 것들도 너무 지친다. 알면 뭐하나 싶다. 진실로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또 다시 같은 문법, 남의 일이니까, 너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등등으로 자책한다 한들 가치 박탈의 힘은 너무 강하다. 쉽게 말해, 안다는 건 무기가 될 수 없다.


 이 들썩거리는 작고 귀여운 악마같은 부정성의 힘을, 어떻게 늘상 새롭게 다시 배치하고 진정시키고 균형으로 가져가야 할지는 참... '다시 태어난다'는 실존의 문법은 원래 이럴 때 쓰인다. 스스로를 좀 멀리서 관찰하는 초연함을 채택하면, 지금 나의 상태는 그저 또 다시 열등함 차례에 놓인 것이구나, 다. 정신의 운동은 절대 현실의 선형적인, 점진적인, 그런 리듬이 아니다. 오르락내리락, 이리갔다 저리갔다, 파동의 반향의 반향, 계속 늘 새롭게 변형된다. 나는 이걸 변증법 따위의 어리석은 논리로 바라볼 마음이 1도 없다. 이건 정반합 같은 생각하기를 포기한 구도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같은 사회는 그런 낡은 관점이 더 이상 호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에로스의 측면에서 보면, 어쩌다 한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까지 핀치에 몰리게 되는지 안쓰럽기도 하다.


 당연히 나의 인격-자아는 기능하고 있다. 그래서 저 깊은 지하로부터 아주 작게 올라오는 소리는 '살려줘'다. 숨 좀 쉬었으면 좋겠다. 폐쇄공포로부터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 나도 세상과 연결되는 순환을 느끼고 싶다. 따위의 간절함이다. 그래서 '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게 20대 초반이었다. 지금도, 나는 나를 구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걸 누가 대신 해주겠어. 데미안 같은 인간이? 너무 어리석은 환상이다. 그래서 소설로 설계될 수 있을 뿐인 그런 허구다. 당사자는, 절대 이 수순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남의 일이니까' 거리 둘 수 있는 일반 독자들이나 헷갈려도 손해 볼 게 없다. 그들은 애초에 구해질 인격 같은 게 있는 절박한 인간들이 아니다. 살기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시간 떼우기, 인식 넓히기, 아는 게 늘어났으면 싶은 마음, 정서를 자극받고 싶은 마음 따위의 소비 층위의 독서일 뿐이다. 이런 구도로 보지 않아야 한다고, 소수자에게 돌을 던지는 게 다수의 문법인 건 어쩔 수 없다. 언제부터 '소수자'를 상상할 수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때론 어이 없는 게 오늘날 PC이고 다양성이고 소수자 의식 변혁 운동이다. 나는 그런 기만과 위선에서 여전히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정서 구도를, 가치 박탈의 포인트가 기존의 방식으로 작동되지 않도록 보다 근본적인 구조 변혁을 꾀하는 건 이성의 숙제다. 나도 찾아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현실'이 '다른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이제 내 인격의 소명은 다 할 거 같다. 더 이상 살기 위해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시를 쓰겠다고 이런 일상을 보낼 필요도 없을 거 같다. 근데, 아직도, 아니다. 일단 지금은 아니다. 언젠가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어쨌든 지금 상태로는, 늘 제자리다. 이 막막함은 늘 먹던 맛이라 이젠 지치지도 않는다. 그래, 맘껏 써라. 날 내어주면서도 휘둘림에 당황하고, 좆같고, 시발 진짜 없애버리고 싶다 하는 충동이 아주 얌전히 잘 잘 수 있게 세심한 컨트롤을 하고. 넌 평온한 세계에 있어, 그 세계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고 보호하고 관리하고 조율하는 내가 있다. 난 안다. 이 '나'가 만약,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이 '나'가 소진되는 순간, 전체로서의 나는 끝장이다. 이 '나'가 마지노선이다. 이 마지노선을 결국 넘어버려 소위 골로 가 버린 무수한 인간들의 삶을, 나는 안다. 그들의 삶은 나에게 반면교사가 아니라 애도하고 간직해야 할 순직 병사들이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가? 정신이라는 전쟁에 왜 뛰어들었나? 나에게 보이는 건 딱 하나다. 그들의 저 깊은 곳에 갇힌 인격의 목소리를, 나는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알아봐주지 못해도, 나는 알아봐줄 수 있다. 그게 나의 마지노선이다.


 세상 현실은 늘 1번이어야 한다.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고,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가치 박탈 대상으로 삼는 '일반 사람들'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고, 가장 앞장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 우선순위가 깨지는 순간, 부정성의 힘이 이겨버리는 순간, 나는 꼼짝없이 삐둘어질 수밖에 없다. 구도의 전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포장해버리게 될 것이고, 관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난도질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망상 차원에서 그럴 것이고, 점차 현실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역량과 그릇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어떻게 관리하고 순환하고 해독해야 할지도 안다, 알지만. 이게 과연 정답일까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직도 인류사에 있어 모범 사례라 부를 만한 '정신'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타협해서 종교에 의탁해야 할까? 타협해서 그냥 한 가지 이념으로 정신을 무장시켜야만 할까? 아니면, 가장 현실적으로, '그만 두기'를 해야 할까? 이상론도, 낭만론도, 현실론도 모두 나에겐 대안일 뿐이다. 이것들은 나에게 마지노선을 넘기 직전에 선택할 수 있는 비상구지만, 들뢰즈처럼 투신을 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끝을 보기는 해야만 한다.


 그래서 결국, 나는 가치 박탈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들썩거리는 정신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모르겠다. 안 보인다. 의식의 관할은 아닌 거 같다. 나는 때로, 나의 무의식을 믿어야만 한다. 전적으로 내맡겨야 한다. 이 기묘한 줄다리기의 기예를, 어떻게 발달시킬지는 의식의 역량이 아닌 거 같다. 자기 자신을 태워 내는 빛이라는 건,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문장이다. 직관은 늘 나를 도와주기에 믿을 만하다. 선취 능력 하나는 참 든든한 동아줄이다. 오늘은 그저, 이런 날이다. 내면의 독기가 풍기는 날. 이럴 때는 최대한 피해 안 가게 내가 현실과 거리를 둬야만 한다. 일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불쾌감이라는 본능적인 감정 반응을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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