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심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영심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놀리기 좋은데 성까지 붙이면 금상첨화. 선배를 약 올리고 싶을 때는 허영심이라고 부르곤 했다.
내가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개구쟁이 스머프'에는 허영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메인 주인공 중 한 명인데 모자에 꽃을 달고 있고 늘 거울을 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허영'을 캐릭터화 한 것이다. 어떻게 보일까가 너무도 중요해서 항상 꾸밈과 단장에 여념이 없다. 그런 허영이 캐릭터가 난 맘에 들었다.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참 좋았다.
허영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만 허영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내가 아닌 남이 한다. 누군가가 정한 어떤 선이 기준이 된다. 그 선을 넘어 꾸민다든지 소비한다든지 추구하든지 하면 분수에 넘친다고 한다. 부자가 시원하게 쓰거나 추구하거나 꾸미는 것은 허영이 아니다. 분수에 맞기 때문이다. 신분제가 있는 사회에서는 신분을 넘은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보일 때도 허영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 있다. 허영이 지나치면 풍선이 터지듯 위험할 수 있다. 실제 삶과 추구하는 삶 사이의 갭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허영을 경계의 대상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허영이라는 향수를 뿌릴 필요가 있다. 나의 눈에 무언가 근사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시도해 보는 것, 멋질 수 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드레스업하고 가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는 척하고 귀가하는 모습 괜찮지 않은가. 클래식을 과연 처음부터 좋아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좋다고 해서 듣다 보니 좋음을 알게 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아해 보이는 누군가의 몸짓이나 말투를 슬쩍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몸에 배일 수 있고. 돈을 모아 세계 웨이터 대회에서 우승한 고급 식당에 가서 한 끼 먹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 않은가. 매사 있어 보이는 척 살 필요는 없지만 멋짐과 우아함을 인정하고 따라 가는 허영심은 우리를 그쪽으로 안내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