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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페페 Oct 20. 2020

길치 애로

이번에도 다른 길이다

왼쪽이 오른쪽이 되고 오른쪽이 왼쪽이 되고. 나는 어디에 있는가.

헤매며 새로운 세상을 보는 거라고? 똑바로만 살아가면 무슨 재미냐고?

그건 웬만하게 헤맬 때 얘기다. 머릿속에 지도가 아예 없는 사람의 애로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여행 중 내 마음에 다가온 어느 공간, 그곳에 다시 간다. 그러나 그 곳은 없다. 헤매고 헤매도 그 곳은 없다. 몇 일 새 그 곳이 사라져 버렸을 리는 없다. 아!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갔던 그 곳들, 내가 좋아하는 그 곳들은 내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다시 찾아 갈 수 없는 곳이다. 

물론이다. 구글맵이 있다. 나의 수호천사다. 토스카나의 외진 농가에서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들로 연결해 준 가이드다. 내 삶에 없을 수도 있었던 장면들을 나에게 선사해 준 은인이며, 엄두도 못 냈을 여정을 거뜬하게 마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친구다. 


운전을 하기 전, 한 선배가 말했다. 차를 몰 수 있다는 것은 가치관을 바꾸는 것보다 세상을 보는 눈을 다르게 해 줄 수 있다고. 운전을 하게 되면서 그의 말에 동감했다. 갈까말까 하던 곳이 선뜻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새로운 접근은 새로운 눈을 준다. 새로운 감각을 준다. 새로운 세상을 준다. 

하지만 운전을 하고 나서도 길치의 애로는 계속되었다. 새벽 골프에 가기 위해 난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발해야 했다. 헤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시간을 일찍 출발해도 난 시간에 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난 지도 보기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다. 길치에게 지도는 난수표다. 동서남북이 와 닿지를 않는다. 그러니 더 보기가 싫다. 일단 가보자는 무모함이 세밀한 준비성을 압도한다. 

미시간 앤아버에서 유학시절, 집에서 학교까지 무려 2시간이 걸렸다. 나름 지도를 본다며 갔는데도 하도 헤매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디가 어디인지를 모른 채 차를 세웠다. 마침 정원에 물을 뿌리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난 그 작은 도시의 지도 밖에 나와 있었다. 나중에 길이 익숙해지고 알았다. 내 숙소에서 학교 클래스룸까지 도어투도어로 7분거리였다. 그렇게 해결된 게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동서남북이 없는 사람에게 한 번 가본 길은 그저 한번 가본 길일 뿐이다. 똑같은 노선으로 반복되지 않는 한, 즉 루트상의 약간의 변화라도 생기면 내 뇌 속의 맵 전체가 혼선을 일으킨다. 길이 익숙해진 이후로도 난 까딱 잘못 든 길에서 헤매며 30분이 걸리기도 40분이 걸리기도 했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은 호기심과 길치의 조합이 나다. 용기와 두려움의 조합이 나다. 도전과 실패의 조합이 나다. 그래도 안다. 길치인 나일지라도 반복은 어느 정도의 익숙함을 준다.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토스카나의 마지막 여정, 피렌체. 편안한 마무리를 위해 난 수년 전 묵었던 호텔에 다시 묵었다. 익숙한 호텔, 익숙한 도시, 편안한 사이즈. 피렌체는 모든 곳이 도보거리에 있었고, 내가 와 본 곳이었고, 같은 곳에 묵었다. 수년 전보다 나는 확실히 덜 헤맸다. 헷갈린다 싶으면 강과 다리를 중심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엄청 헤맸다. 내가 갔었던 가게를 다시 가지 못했고, 좋아하는 카페를 찾아 가는 길은 매번 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호텔, 큰 성당 바로 앞에 있는 호텔 드 라빌, 일주일 동안 호텔에 돌아가기가 수십 번은 되었을 것이다. 난 단 한번도 단 한번에 찾아가지 못했다. 

내가 방문했던 곳이 내 것이 되려면 그 곳이 떠올라야 하고, 가는 길이 그려져야 한다. 걸어 다닌 여행이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의 그 곳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도 살아가면서 나의 플레이스들이 늘고 있다. 머무는 기간을 늘리거나, 같은 곳을 반복해서 간 덕분이다. 세상에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을까마는 길치인 나에게 와 준 곳들이기에 감사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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