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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Apr 05. 2021

상처 받은 자의 위무 - 기준영 <사치와 고요>

OE 수첩 - 기준영 <사치와 고요>




미주는 광막한 어둠 속에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손님들을 초대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겠니?”
“손님? 누굴요?”
“울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이랑, 사랑이 많은 사람이랑, 그리고 ……”  


“그럼 가지 말고 조금만 더 계시라고 전해줘. 선생님이 잘 자라고 노래할 거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들어오라고.”
“밖에 누구요? 누가 있는데요?”
“누구든.”  



상처는 흔하다. 거리에는 온갖 죄들이 활보하고, 사람은 ‘우연’한 일상이라는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어서 쉴 새 없이 거리에 내던져진다. ‘우연’은 끊임없이 사람을 배반한다. 온갖 삶의 고통과 환희가 오르내리는 거리 위에서 상처는 덧나고 다시 치유된다. 그리고 거리 위를 걷던 상처 받은 작은 아이가 당신을 위해 ‘소박한 오늘의 안녕’을 되새길 때, 변함없이 어둠이 내리고 빛은 골목 위에 그어진 실금처럼 파고든다.




“요즘 지키고 있는 규칙은 단순해요. 비타민을 챙겨 먹고 산책하면서 한 시간씩 햇빛을 받아요. 바싹하게 잘 마른 빨래처럼 되려고요.”


이 작품의 문장은 반듯하고 정갈하다. 작가는 문장 안에서 모든 것을 말하려 들지 않는다. 여백을 충분히 두며 그 안에서 읽는 이가 잠시 쉬어가며 멈추는 시간을 제공한다. 문장은 시적이며 생활의 철학을 담고 있다. 쉽게 쓰이지 않았음에도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장의 여백은 읽는 이에게 평화로운 것 이상의 산뜻하고 미묘한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그 일을 원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에, 하필 그런 제게 때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말을 거는 이 우연이 저를 어디로 데려갈지 살피겠다고 마음먹었다. ...


7월 첫 주, 해가 쨍한 평일 오후 4시경에 미주는 마치 납치되듯이 한 전원주택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콜택시에 오르자마자 누군가가 저를 훔치듯 낚아채 목적지로 빨아들이고 있다고 느꼈을 따름이다.


미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릿한 안도감을 느꼈다. 쓰러져 주저앉게 된 곳에서 문단속을 하고 있느니 차라리 한데서 문제들이 저를 선택하도록 스스로를 열어 허락할 것이었다. 그러고도 너무 애쓰지 않는 당분간, 미주는 그걸 원했다.


 작품은 ‘우연 의지한 전개를 진행한다. 합리적이고 마땅한 이유가 아닌 우연하고 감각적인 계기로 주인공이 하나의 선택을 만들고, 그것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힘이   이야기는 미묘하고 낯선 분위기를 자아낸다. ,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끌어와서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철학을 관통하는 독자를 위한 ‘조용한 충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긴장을 하면 도리어 잠이 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릴 때 내 딸이 그랬어요. 걘 너무 예민해서 여기 오래 머물지 못해요. 난 가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네?”
그때 훈이 끼어들었다.
“거짓말이야.”  


그래서 어쩌면  작품의 구조는 불안하다. 정리된 방식이 아닌 우연에 의한 빗금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주인공 '미주' 태도 때문이다. 그는 ‘보육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편안한 얼굴이 되어준다. 자연스러운 위로와 치유  자체의 정체성을 주인공 미주는 가지고 있다. 그의 영혼은 상처 받았기에 소설 안에서 어쩐지 기묘한 일상을 이어가지만, 일관되고 안정적인 ‘보육교사로서의 인물됨을 끌고 소설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


물론 상처 받은 주인공 미주 또한 아이의 존재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음에 분명하다. 계은과 훈으로 등장하는 이 아이들은 단순히 보육되는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스스로 상처 받은 영혼이며 어린 아이이지만, 미주에게 분명 ‘다른 날들로 걸어 나’가게 하는 힘을 주는 존재이다.



“다 싫어서요. 나 우는 거 구경할래요?”
“계은이 원하면.”
계은이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쏟는 동안 훈이 입을 비죽거리더니 팔뚝으로 제 눈가를 훔쳐냈다. ...



미주는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는 그냥 울게 내버려 둔다. 아이들은 미주 앞에서 그저 울고 싶은 것이다. 진실하고 순수한 아이의 울음 앞에서 미주와 아이들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위로를 주고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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