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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Aug 03. 2023

색(色)과 자연, 그리고 의지(意志)의 시

효구 비평


본 글은 계간 <시와사상> 2022년 여름호에 수록된 시평입니다. 



1. 색(色)과 자연(自然)의 시론 - 안차애론




A 흑색, E 백색, I 적색, U 녹색, O 청색. 모음들이여,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잠재된 탄생을 말하리라

A, 잔인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고 있는

그 번쩍이는 파리 떼의 털투성이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 E, 안개와 천막의 순결,

당당한 빙하들의 창,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떨림.

I, 자줏빛 옷감, 토한 피, 분노 혹은 속죄하는

도취 속의 아름다운 입술의 웃음.


U, 순환주기들, 진한 초록 바다의 신적인 진동,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금술이

학구적인 넓은 이마에 새기는 주름살의 평화.


O, 기이한 쇳소리로 가득 찬 지고의 나팔,

세상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르는 침묵.

오, 오메가, 그이의 눈의 보랏빛 광선!


아르튀르 랭보, 「모음들」[1]



   객사한 파리의 방랑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그의 시 「모음들」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론, 색에 대한 ‘잠재된’ 시적(詩的) 가능성을 선포한다. 그가 거리를 떠돌며 발견한 것은 다섯 가지의 빛이었다. 랭보는 흑(黑), 백(白), 적(赤), 녹(綠), 청(靑), 다섯 가지의 색을 각각 영어의 모음 A, E, I, U, O와 연결 지었다. 이는‘색채’가 시인이 시적 사물을 인식하고 구성함에 있어 중요하게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시인이 발견한 세계의 빛을 시 언어로 구현하는 일은 단순히 시각적인 묘사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메타포(metaphor)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색채 미학 관점에서의 시작(詩作) 과정은 시를 논함에 있어 중요한 방법론이 될 수 있으며,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정해진 색의 규명에 수긍하는 것을 넘어서서 감각 주체가 주관적으로 색을 해석하고 새롭게 명시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일찍이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가, 그리고 괴테가 자신의 『색채론』에서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눈 속에 불이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을 뜨면 빛이 바깥으로 퍼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깊은 밤에 우리 내면의 풍경을 밝혀 주는 꿈 속의 빛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과도 같다.” …[2]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는 사람의 내면에 ‘불’, 즉, 빛이 있어 그것이 스스로 발하여 바깥 사물을 인식하게 하는 원동(原動)이라고 보았다. 괴테도 마찬가지였다.  



“… 그래서 우리는 아주 보편적인 근원 현상들로서 나타나는 색채가 눈이라는 감각 기관 – 색채는 무엇보다도 여기에 속한다 – 즉 시각(視覺)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이 시각을 매개로 하여 감정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 앞에서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다. …”[3]



   괴테에게 있어 빛은 ‘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괴테는 ‘눈’을 가진 주체에 의해 빛의 의미가 완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괴테의 해석에 따르면 ‘색채’의 의미는‘사물을 바라보는 주관성’에 달려있다. 수량 과학적으로 색을 정의했던 뉴턴과 달리, 괴테는 색이 주체에 의해 다양하게 의미화될 수 있다고 여겼고, 나아가 여러 가지의 색이 개인에게 정서적으로 특별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괴테가 ‘시적(詩的) 사유’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경외심(敬畏心)’을 일으키는 근원적 인식을 가능하게 했으므로, 문학가 괴테에게 중요한 창작 영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시 창작(創作)은 궁극적으로 언어의 장벽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인에게 언어는 훼방꾼인 동시에 해방의 도구이다. 시인이 꿈꾸는 이상은 언어를 넘어선 위치에 있다. 시인이 감각한 대상이 시 언어를 통해 시로 완벽하게 구현될 때 시인은 해방된다. 즉, 시 언어의 실현을 통해서 시인은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어떤 시인은 꿈처럼 아득하고 몽롱한 말로, 어떤 시인은 어둡고 느린 읊조림으로, 어떤 시인은 신들린 듯한 노랫말로 시를 말한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시인은 신체의 오감을 동원한 감각 언어로 시를 실천하기도 한다. 



덜 여문 공기 방울들을 징검징검 밟고 가면

글썽이는 게 있다

푸른빛 튕기는 소리가 난다





귀가 지워진다

검은 얼룩이 한발 먼저 지워진다

마르면서 다시 젖는다


안차애, 「묘시(卯時)」



   안차애는 주로 오감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시 언어를 완성해나간다. 시인은 색에 대해 각별하다. 각기 다른 시적 장면 위에 빛들이 자유롭게 유영한다. 시인의 세계는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 찬 캔버스 위에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안차애의 시는 특별히 회화적이다. 그는 작화(作畵)하듯 시작(詩作)한다. 그가 감각한 대상은 캔버스 위에 ‘와르르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시인은 랭보가 「모음들」에서 고른 다섯 가지의 색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각각의 시편 속에서 녹여냈다. 「개, 너머」, 「프라이부르크의 검은 숲」, 「-슥」, 「스크래치」, 「묘시(卯時)」, 「검은 지층」에서 흑(黑)색을, 「젖빛이 운다」에서 백(白)색을, 「황홀한 몰락」, 「오늘의 메뉴는 빨강」, 「달콤한 뼈의 홍루몽」에서 적(赤)색을, 「푸른 몸」, 「사막에서 잠들다」, 「아무튼 파랑」에서 청(靑)색을,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에서 녹(綠)색을 노래했다. 전체 시집 중 1/4에 해당하는 시들의 지배 심상이 단 하나의 색채라는 점, 그리고 그중에서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가 시집의 표제라는 점은 시인에게 ‘색(色)’이 주는 영감의 각별함을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너무 가벼워서 풀풀 날리는

형체도 없이 떠도는,


삼키지 못한 기척이 쑥쑥 자라납니다. 


안차애, 「시나몬처럼」



   또한, 시인은 시를 통해 한계 없는 장소성을 구축해낸다. 무한한 세계, 현실에서 이룩할 수 없는 환상적인 세계는 ‘악절’ 속에서 무너지고 떠오르는 ‘음악의 변주’로 그려지기도(「슈만이 있는 풍경」), ‘이동하지 않고도 속도를 일으키는 어류’처럼 ‘솟아오르는 바다의 출렁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나무의 바다」). 이 세계에서는 장소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적 대상은 언제든지 원하는 추상(抽象)의 형태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시인이 발견한 대상과 장소는 수치로 규명할 수 없는 추상의 형태이기에, 대상은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면서’ ‘취한 밤처럼 흘러내’릴 수도 있다(「자리들」). 이들의 이동은 날렵하고 거친 수직(垂直)의 비상(飛上)과는 거리가 멀고, 소음 없이 고요하며, 낮은 속도의 움직임에 가까워서 우아하게 느껴진다. 이 움직임은 자연 본래의 모습을 닮아있다.



… 자연은 삶을 에워싸고 있는 전체이면서, 오늘 이 시점에서 인간의 감각에 언제나 현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밖에 있으면서 또 안에 있다. 그것은 편재하며 동시에 나 자신의 감각과 체감 안에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나의 인식 능력으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4]



   안차애는 규명된 색을 인정하지 않는다. 괴테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색을 스스로 규명하고 재해석한다. 이것은 문학 창작이 단순한 허구(虛構)나, 세계의 모방(模倣)이 아닌 ‘인식(認識)’과 ‘감각(感覺)’의 원천, ‘자연(自然)’과 ‘신체(身體)’의 본래적 자극과도 깊이 연관됨을 설명한다. 이러한 생태적 시선에서 안차애의 시는 ‘자연’과 ‘사람’에 가깝다. 다정하고, 친근하며, 근원적이다. 현대 문명 속에서 상실되어 가는 ‘자연’의 본래 모습을 안차애는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색(色)’과 우주의 시어로 기억한다. 





2. 아름다운 의지(依支)의 세계 - 최정란론




   최정란의 다섯 번째 시집 『독거소녀 삐삐』에서 첫 번째 수록작이 「거절학개론 – 이 필수 교양서의 목차를 지운다」인 점, 「독거소녀 삐삐」가 표제가 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왜 시인은 자신이 ‘거절’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하는가? 왜 ‘수락(受諾)’하지 않고 ‘부정(否定)’하는가? 왜 관계를 신뢰하지 못하며 ‘너를 거절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차라리 ‘나를 거절’하고 마는가? 왜 너 대신 ‘나’의 희생을 선택하는가? 「독거소녀 삐삐」는 왜 홀로 골목을 떠도는 처량한 ‘노인’인가? ‘슬픈 일 기쁜 일 아픈 일’만 있어 외로운 그는 왜 하염없이 ‘기다리는 놀이’만을 해야 하는가?



낱낱의 아픈 기억을 다음 생이라 불러도 될까

시든 거울이 휘어진 생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최정란, 「해바라기」



허리케인 회오리쳐 피어나는 꽃의 해역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은 모두 병이 된다


최정란, 「버뮤다 제라늄」



   최정란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겪는 삶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다.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기에 차라리 다른 방식 – ‘더 나은’ 방식으로 인생을 해석하고, 그 안에 온몸을 던져 적극적으로 생(生)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농담의 힘을 믿고 끝까지’ 밀어붙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시 속 고독과 슬픔은 ‘명랑’하게 ‘상승’하는 방향으로 끌어 올려진다. 차마 웃지 못할 현실 속에서 전사(戰死)할 운명으로 상황이 급격히 불리해질지라도, 그는 숫제 마술봉을 휘두르며 뛰어내리는 ‘눈물광대’, ‘달리는 하니’, ‘독거소녀 삐삐’가 되고 만다. 



우는 것보다 싸우는 것이 낫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는 저마다 총량의 전쟁이 있다 …


최정란, 「반상회 401」



   최정란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일치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인정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만족은 부정적이고 고통은 긍정적’[5]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직접적인 목적은 괴로움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특수한 개별적인 불행은 예외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디에나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6]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은 ‘의지’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을 숭상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니체식 의지 철학에 중요한 사상적 힘이 되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했던 ‘의지’가 고통으로 찬 삶을 살아갈 근본적인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의욕이 모든 것을 생산해 내는 주동이며 창조의 힘”이며, “이것은 정지가 없고 분열과 분해를 묶어 하나로 전진시키는 힘”[7]이라고 말했다. 



그대, 현명한 자들이여!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시험하라! 내가 삶 그 자체의 마음으로 파고들었는가를! 그리고 마음의 밑바닥에까지 뚫고 들어갔는가를!


나는 생명이 넘치는 자를 볼 때 거기서 반드시 힘에의 의지를 보았다. 그리고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보았다.[8]



   최정란의 시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발견하자면, 삶의 쓴맛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수긍한다는 점이다. 최정란은 사회의 불합리나 편견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대신 ‘그 삶의 바닥의 바닥까지, 삶의 끝의 끝까지(「단골이 되기에 너무 늦은 술집은 없다」)’ 돋보기를 비추어 재차 바라본다. 그는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는가를 불평하고 비판하지 않는다. ‘네버랜드’에 대한 환상에 빠지기보다는, ‘후크선장’을 사정없이 패대기치는, 위태로운 세계의 ‘갈고리’, ‘번번이 떨어지고 마는 불량 갈고리’에 주목하고, 그것을 간파(看破)하려는 편에 가깝다(「후크선장」). 시인은 ‘꽃집’에서 안녕을 노래하기보다는, ‘삶과 죽음이 뒤섞인 거리’, 그 각박한 도심의 뒷골목에서 휘파람을 불며 ‘길 잃기를’ 선호할 것이다(「묘지지도」).

   소녀(小女)가 세계의 핍박은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의 부모는 ‘야반도주’하거나 죽은 지 오래되었고, 그들의 몸은 ‘날아오는 돌에 멍이’ 들었다「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그들은 ‘직업’과 ‘애인’과 ‘결혼’을 포기한다(「해피 어스 데이 투 유 Happy Earth Day to You」).‘겨울이 길어’져 ‘길어진 근심’을 끌고 다닌다(눈의 결정을 뜨개질하는 소녀들). 소녀들은 그저 서툴고, 미완성이다.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다행이야 삶과 몸 말고는 믿지 않게 되어 다행이야 … 우리는 어떤 세계에서라도 살아 있으면 되는 거야 적의 나라에서라도, 괴물의 세계에서라도, 


최정란, 「십자뜨기」



   니체는 “아름다움 속에서 반대하는 것들이 극복된다”[9]고 했다. 세상이 그를 저버릴지라도, 최정란은 ‘삶과 몸’의 힘을 믿는다. 그의 시 세계에서 미완성되었지만 멈추지 않는 ‘의지’는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지옥을 극복하는 ‘너머의 무엇’이다. 




[참고 문헌]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문학과지성사.

 마가레테 브룬스, 『여덟 가지 색으로 풀어 본 색의 수수께끼』, 세종연구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색채론』, 민음사.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삼인.

 크리스토퍼 제너웨이,『쇼펜하우어』, 시공사.

 쇼펜하우어,『쇼펜하우어 인생철학』, 동서문화사.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누멘.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 의지』, 부글북스.


                 

[1]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 – 랭보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4년, 109쪽.

[2] 마가레테 브룬스, 『여덟 가지 색으로 풀어 본 색의 수수께끼』, 세종연구원, 1999, 16쪽.

[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색채론』, 민음사, 2003, 248쪽.

[4]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삼인, 1999, 360쪽.

[5] 크리스토퍼 제너웨이,『쇼펜하우어』, 시공사, 2001, 150쪽.

[6] 쇼펜하우어,『쇼펜하우어 인생철학』, 동서문화사, 2020, 23쪽.

[7]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누멘, 2010, 16쪽.

[8] 같은 책, 139쪽.

[9]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 의지』, 부글북스, 2018, 5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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