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구 비평
본 글은 반연간지 <시인들> 2023년 가을겨울호에 수록 예정인 계간평입니다.
1. 사유(思惟) - 비非인간(non-human)
당신이 혼자 동물원을 거니는 오후라고 하자.
내가 원숭이였다고 하자.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
나는 거대한 원숭이가 되어갔다. …
외로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당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넘어서는 것
이장욱, 「원숭이의 시」 中
만약 당신이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당신은 주관적 경험에 근거한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다. 퇴근길 우연히 발견한 새끼 고양이 한 마리에 대한 측은함의 감정,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얼룩말과 그 선명한 무늬에 대한 생경함에 대한 기억, 혹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처럼 길러온 반려견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을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겪었던 생활상 안에서, 즉 스스로의 경험에서 멀지 않은 범위 내에서 당신은 이야기할 수 있다.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험’이란 한 개인의 내력으로 그 범위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장욱은「원숭이의 시」에서 넌지시 묻는다. 당신이 ‘동물원의 원숭이’라면, 인간에 의해 태어나고 길러진 존재, 인간을 위한 구경거리, 인간으로서는 감히 그 생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한 마리 원숭이가 되어버리고 만다면, 당신은 그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것을 ‘당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과 의지 너머의 차원이면서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얼마 전 엔데믹을 기다리던 애독자들의 발걸음으로 성황을 이룬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비인간’이었다. ‘비인간(non-human)’. 그 의미가 워낙 광범위해서 평소 이 단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로써는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비인간’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본문에서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비인간’은 누군가를 ‘비인간적이다’라고 비난할 때의 ‘사람답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사전적 표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인간’의 의미는 ‘인간 이외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 혹은 문화와 같은 인간 고유의 양식을 도구 삼지 않은 채, 인간 아닌 존재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비인간(non-human)’의 개념은 인간 아닌 존재의 ‘인격’ 유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생태주의적 관점의 인식인 경우가 많다.
‘비인간’.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인간 아닌 것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 아닌 것을 향한 완전한 수평 인식을 할 수 없다. 인간이 비인간 존재가 되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인간을 논하더라도 결국 ‘인간’의 시선으로 상상하고 유추하면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비인간이라는 인식을 향해 완곡하면서도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휘리리릭!
한 떼의 검정이 지나간 거야
난데없이
…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정 끈 같은 것이
어떤 밤의 긴 꼬리 같은 것이
이경림, 「고양이들」 中
이경림의 「고양이들」은 초겨울 동백나무와 팽나무가 있는 여유로운 숲길 풍경 속 빠르게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마치 한 편의 그림처럼 인상적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아침 산책을 하던 화자는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잽싸게 이동하는 한 무리의 고양이 떼를 발견한다. 시인은 고양이 떼를 ‘검은 구름 한 무리’,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정 끈’, ‘어떤 밤의 긴 꼬리’로 비유하는데, 고양이들을 ‘용도’, ‘끈’과 같이 하나의 ‘사물’, 특히 인간 관점에서 사용할만한 도구로 이해했다는 점은 이 작품의 주체가 객체인 ‘고양이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휴머니즘적 인식을 보여준다.
… 그는 땅속에 있었다 내어 쉬는 숨이 아니라 안으로 잦아드는 숨을 쉬고 있었다
…
그는 가끔 외출한다 그는 가끔 있다
…
오늘은 이쪽 잎을 달고 내일은 저쪽 잎을 달고 또 오늘은 물관을 타고 순을 키워 꽃받침을 세우고 또 내일은 꽃을 거울에 띄우고 이상적인 그를 끌어 올리는 것이다
…
고요함을 넘어 오래 정지된 순간을 중심으로 돌며 며칠간 집으로 드는 것이다 집으로 들 때 떨어진 꽃잎을 모아 한 다발 이야기, 외출하던 자세로 약간 공중에 떠 있는 자세로 말라가는 꽃 한 송이, 작게 응결되는 씨앗 하나
박춘석, 「한 송이」 中
… 그러나 나는 지나가는 식물이다 말을 하는 동안 식물들은 조금씩 흐려져서 사라지길 원했다 고체화되어 있던 것들이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기계에는 마음이 없다지 자연에는 마음이 없다지 나도 마음을 버리는 태도로 당신과 대화를 나누어볼까 했다
…
사람들은 아무 것도 이해되지 않는 한 그루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돌아가겠지…
박춘석, 시작 노트 中
한편, 같은 지면에 수록된 박춘석의 「한 송이」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공간(‘집’)에서 공존하는 사람들의 관계성에 천착한 시인의 집요한 사유 과정을 보여준다. 화자는 집에서 기르는 ‘한 송이’ 꽃,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꽃’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박춘석이 시작 노트에서 말했듯이(‘나도 마음을 버리는 태도로 당신과 대화를 나누어볼까 했다’), 시인은 식물 그 자체에 자신의 마음을 대입해본다. 그리고 ‘내가 식물이라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한다. 시인은 자신이 식물이라면 ‘사라지길’, ‘자유로워지길’ 바랄 것이라 여긴다. ‘오래 정지된 순간을 중심으로 돌며’, ‘외출’하고 ‘집으로 드는 것’을 반복하는 ‘꽃 한 송이’를 향한 사유는 마침내 ‘씨앗 하나’로 응결된다.
이러한 작법은 김춘수가 ‘꽃’을 향한 사유를 통해 언어의 미학을 시도했던 모더니즘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미학적 의미의 ‘꽃’이라는 대상, 인간이 부여한 ‘꽃’이라는 상징성에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아닌 생물 대상으로서의 ‘꽃’을 이해하기 위한 시인의 끈질긴 사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의 목표가 ‘언어’보다는 ‘꽃’에 대한 이해에 있고, 그것이 인간의 삶이나 철학을 반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에 이 작품은 휴머니즘 그 이후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박춘석이 시작 노트에 썼듯이, 인간은 한 그루 나무를 올려 볼 수는 있어도 나무를 이해할 수 없다. 나무의 마음은 나무만이 알 수 있다. 어쩌면 나무는 마음조차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이해하는 차원이나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에 인간 아닌 생명의 세계가 있다. 문학은 그것을 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예측하며 상상해낸다.
2. 전망(展望) - 인류세(Anthropocene)와 툴루세(Chthulucene)
인류를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시대 ‘세(-cene, epoch)’가 합쳐 이뤄진 말인 ‘인류세’는 네덜란드의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천을 비롯한 국제 지권-생물권 프로그램(the International Geosphere-Biosphere Program) 참여 과학자들의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설명한 개념으로, 홀로세(Holocene) 이후 지구의 엄청난 지질환경적 변화에 인류가 절대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인류세’ 개념이 인간과 다른 종 사이의 풍성한 관계를 포착하기 시작하며 인간중심주의를 막 벗어나려던 시점에 다시 인간중심주의를 도입하고 강화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비판하고 대안으로서 툴루세(Chthulucene)를 제안한다. 툴루세의 ‘툴루(cthulhu)’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피모아 크툴루’라는 거미의 이름에서 가져온 어원으로, 대지와 그것을 둘러싼 자연의 분해 및 생산의 힘과 관련한 시공간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해러웨이가 툴루세를 설명하기 위해 채용한 개념 중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동생성(sympoiesis)’이다. ‘공동생성(sympoiesis)’이란, ‘생명은 다른 존재와 서로를 만들면서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는 뜻으로 ‘함께 되기’(becoming with), ‘세상 만들기’(worlding)의 과정을 포괄한다. 이처럼 해러웨이의 툴루세가 주창하는 것은 ‘상생’이며 이어 소개할 안태운의 「기억, 몸짓」에서는 궁극의 ‘만남’ 혹은 ‘하나 됨의 몸짓’을 통한 ‘상생’의 메시지를 담는다.
어느 봄, 춤추는 몸짓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표정과 주름과 흠
어느 여름, 비인간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이미지를 접했다
어느 가을, 바람이 불었을 때 느끼는 나에 대한 촉감
안태운, 「기억, 몸짓」 中
안태운의 「기억, 몸짓」에서 시선은 어디에든 있다. 희미해지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화자의 시선은 ‘해식동’, ‘곶자왈’, ‘숲’, ‘길’, ‘굴’ 등 ‘당신이 머뭇거리는 시공간’ 어디로도 이동하며, ‘내 숨은 또 다른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고 했으므로 시적 주체는 화자 자신일 수도, ‘당신’일 수도 있다. 이들의 시선과 사유는 어느 때,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시인의 기억을 따라가는 이 움직임은 일반적인 인간의 행동 양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며 차라리 가장 원초적인 자연의 일부, 자연 안에서 흐르는 본능적인 ‘몸짓’과 ‘의식’, ‘이미지’의 연장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거대한 흐름에서 해러웨이가 바라는 인류세 다음의 세계, 툴루세(Chthulucene)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몸짓
당신이 머뭇거리는 시공간
흩날리는 재가 도시의 불빛에 비친다
아스팔트 위로 식물이 번창한다
당신은 걸어간다 당신의 몸을 보호하는 재질들로 꽁꽁 싸맨 채
…
안태운, 「기억, 몸짓」 中
마치 원시 자연의 생동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카메라의 줌 인-아웃처럼 섬세한 움직임이 이어지는 와중에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도시의 불빛’과 ‘흩날리는 재’, ‘아스팔트’, ‘몸을 보호하는 재질들로 꽁꽁 싸맨’ 인간의 모습이다. 여기서 낯선 인공의 장소를 맞닥뜨린 시적 주체는 겁에 질린 채 그곳을 빠져나간다. 그가 만나는 무수히 많은 ‘생명’과 그것에 대한 선명하고 낯선 감각들은 ‘폭우’, ‘불길’, ‘방아쇠’, ‘밀렵꾼’, ‘전쟁’의 파괴력과 위협으로 인한 불안의 정서와 또렷하게 대비된다. ‘생태 통로’의 매개를 통해 계절을 드나들며 만나는 비인간을 향한 기억은 인공의 장소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 생경하게 드러난다.
몸짓들
다르고 같다는 걸 알았다
같고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 어느 날 우리가 여럿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잠들고 꿈꾸고 깨어나는 우리가 여럿이라고 생각하니
드넓어지는 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여럿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여럿이라 슬펐다 기뻤다 하염없었다
안태운, 「기억, 몸짓」 中
이 작품은 기승전결의 짜임새 있는 서사라기보다는 기억의 단편과 그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들의 나열 혹은 연결에 가깝다. 마치 시간을 역행하는 듯한 여정 속에서 계절이나 장소에 구속되지 않은 채 아득하게 이어지는 상(狀)들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건져낸 날 것 그대로의 모습, ‘꿈의 언어’이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몸짓’하는 본래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가 도달한 곳은 ‘우리가 여럿’이 되는 ‘궁극의 만남’의 자리이며, 여기에 해러웨이의 ‘공동생성(sympoiesis)’이 있다. 해러웨이의 툴루세(Chthulucene)는 여럿이 만나는 ‘관계’와 ‘돌봄’ 속에서 실천 가능하다.
안태운의 「기억, 몸짓」의 경우, 기존 시 경향과 비교할 때 다소 실험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시인의 실천적 의지와 관련이 있다면 의미 있는 시도이다. 이 작품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압도되는 면이 있다. 그 이유는 실제로 시인이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혁명을 말하자Nous disons revolutio>(2021)의 내레이션을 낭독하기 위해 한 편의 시로 각색하였고, 그 모든 활동을 기반으로 이 작품을 써냈기 때문이다. 시인은 구체적으로 각주를 달아 ‘그 이미지-텍스트-활동에 대한 의식적이며 의지적인 산물이자, 친구-여럿-동지 시’라고 설명한 바 있다.
박춘석과 안태운의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문학은 인간 아닌 존재에 대한 집요한 고찰을 통해 탈인간중심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현시대보다 더 넓고 거대한 가능성에 기대어 상상하고 감각 하는 방식을 택한다. 보다 ‘비인간’이고 낯선 형태, 날 것 그대로의 움직임을 상상한다. 해러웨이는 그의 저서 『해러웨이 선언문』에서 선진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분법 구조 속에 구속된 언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제한 효소와 같은 무엇, ‘언어의 시인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인의 언어는 그의 몸과 연결되어 있으며 몸은 대지(大地)의 일부로 그것에 맞닿아 있다. 시인의 몸과 감각을 통한 직관은 예술이 미래를 통찰하는 중요한 방법론의 하나이다.
비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이것은 분명 인류세가 맞이하게 될 기후 환경적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필자가 ‘비인간’에서 ‘툴루세’로 화두를 돌린 이유는 ‘비인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시대의 위기에 대해 ‘툴루세’가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포스트 휴머니즘으로 나아가는 작금의 사태 속에 비인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인류세를 살아가는 인간의 다음 세계, 앞으로 도래할 ‘종’의 미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도나 해러웨이는 말한다. “인간은 지구와 함께 있고 지구의 존재이며, 이 지구의 생물적이고 비생물적인 힘들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혼자 아닌 ‘여럿’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제 ‘여럿’의 이야기로 나아갈 차례이다.
<참고 문헌>
이장욱,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현대문학, 2022년.
반연간 『시인들』, 2023년 봄·여름호.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봄호.
이광석, 「‘인류세’ 논의를 둘러싼 쟁점과 테크노-생태학적 전망」, 『문화과학』 97, 2019.
황정하·홍성욱, 「툴루세 시대의 바이오아트」, 『탈경계인문학』 29, 2021.
도나 해러웨이(최유미 역),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
도나 해러웨이(김상민 역),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문화과학』 97, 2019.
도나 해러웨이(황희선 역), 『해러웨이 선언문』, 책 세상, 2019, 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