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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Jan 04. 2021

무질서에 관한 시집 노트 2

OE 시론 - 네 권의 시집을 논하다 2

[ CONTENTS ]


1. -


2-1.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2-2.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2-3.  김선재, 『목성에서의 하루』    

2-4.  이원, 『사랑은 탄생하라』    


3. -




2    



1.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시 수업 중 소개 받았던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은 시집을 구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빛을 빨아들이면서 곧 사라지게 되는 ‘백자’와 백자로 남은 ‘마음’과 그 ‘빛’과 ‘수많은 여름’, 그 모든 것이 있던 ‘방’, 결국 사라진 ‘나’의 모습은 단연 강렬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단 하나의’라는 수식어였다. ‘단 하나의 백자’와 ‘단 하나의 질문’과 ‘단 하나의 여름’이라 적힌 이 반복 어구가 마치 자주 듣는 노래처럼 입 안에, 귓전에 이상할 정도로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나는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외의 다른 시들을 읽으면서 시인의 말하기에 어떤 종류의 ‘힘’이 있음을 느꼈다. 시인의 시선은 시 속 정황 안으로 빠르고 힘 있게 밀고 들어가진다. 여성 시인들의 섬세하고 유유한 말하기 방식과 달리 황인찬 시인은 빠른 속도의 전달력, 독특한 소재를 통한 집중력, 간결하고 가벼운 문장의 무게감으로 승부한다. 





내가 신세 졌던 이층집의 이 층에서

도무지 내려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내가 있고, 일본의 주택가에서는 까마귀가 자주 보인다 까마귀는 생각보다 크구나


놀라울 일이 없는데도 나는 놀란다


창이 넓게 트인 거실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희박하고 조용한 생활, 이 층에서도 같은 것이 보일까? 의문은 이 층에 가로막히고, 거실의 조도는 최대치에 달했다 거실의 공기는 너무 희박해서 숨 쉬는 일도 어려운 것 같다 사물들이 자꾸만 투명해지는데 그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선명하게


대체 저게 뭐지? 갑자기 그가 물어서

저건 까마귀야, 나는 대답했고

까마귀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또 놀랍다



거주자




 시인은 ‘동물’들을 소재 삼아 이야기의 집중력을 높인다. <거주자>에서는 ‘까마귀’가, <구원>에서는 ‘사냥개’가, <법원>에서는 ‘쥐’가, <세컨드 커밍>에서는 ‘검은 거위’가 그것이다. <거주자>에서는 ‘도무지 내려오지 않는 그’와 ‘그를 기다리는 내’가 ‘조도가 최대치에 달한 거실’에서 만나는 모습을 그린다. ‘숨 쉬는 일이 어렵고 사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절정의 순간에 비로소 만난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까마귀’이다. <구원>과 <법원>, <세컨드 커밍>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가 말하려는 것은 동물로 선택된 소재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구원에 대한 절실함을 ‘사냥개’를 통해서, 죄와 벌에 대한 생각을 ‘죽은 쥐’를 통해서,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을 ‘검은 거위의 울음’을 통해서 말하며 효과적으로 심상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한편 아주 빠른 순간을 순식간에 스며드는 이야기들은 간결한 문장으로 나타난다. 그의 시에 독자들이 매료되는 것은 짧고 경쾌한 문장이 주는 힘에서 비롯된다. 주로 ‘...이다’로 끝나는 짧은 문장은 읽기 편안하고 시상을 전달하는 효율에 있어 무겁지 않아 독자에게 친절하다. 또한 시인은 나타내려는 것을 반대되는 표현으로 말하는 바의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시적 대상은 주로 ‘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레코더>에서 ‘교탁 위에 놓인 리코더’는 ‘불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지만 ‘그 아이는 리코더를 불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리코더를 안 불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보고 있다’. 리코더를 ‘불었더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것>에서 ‘그것’들을 생각하자, ‘그것’들은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은 구체적인 테두리를 가지고 틀 속에서 형태를 가져야만 했을 테고 시적 정황은 다른 차원으로 설명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이 시집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시를 쓴다는 어떤 청년을 보았다. 나의 집에 그의 방이 있었는데 그의 침대에 내가 누웠다. 그도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그의 방을 떠나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욕실의 각도가 이리 저리 변하였다. 각을 이루던 욕실 두 벽면은 한 면이 되었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시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꿈의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 사무실로 가야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책상 아래 숨겨 놓은 종이 위에 끄적거리던 것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어디선가 청년은 그것이 시라고 알려주었다. 무릎 위에 있던 한 장 종이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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