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 시론 - 네 권의 시집을 논하다 3
문학에 빠진다. 깊은 잠에 드는 것 같다. 깨어나면 한동안 몽롱할 것이다. 시는 내게 안락이다. 하지만 시정(詩情)의 향으로 푹 젖었던 마음은 어느새 건조해진다. 무질서하고 변화무쌍한 둥지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정신 차리면 끔찍해져 버린 마음을 발견한다. 오염된 기름에 젖은 죽은 새의 가슴팍. 현대인은 기름에 젖은 새다. 안희연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마음을 다독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퇴근 후 업무의 그림자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가까스로 책장을 넘길 때, 읽어도, 읽어도 처음 읽는 듯 문자는 새롭기만 하고 시의 심상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이 시집을 다 읽고 나서 느낀 것이지만 서정적인 시집 제목과는 달리 시인의 시정(詩情)은 끔찍했다. 그래서 아팠다. 그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오래 아팠다.
시를 읽어내는데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시 속 배경 안에서 시가 만들어지지 않고 그 배경 자체가 자꾸만 넓혀지는 방식으로 시가 쓰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집에는 세 편의 <백색 공간>이라는 시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 <백색 공간>에서 ‘일초에 하나씩 / 새로운 옆을 만든다’고 표현한 것처럼 두 번째와 세 번째 <백색 공간>에서도 화자는 ‘흰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미끄러지면서 /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글자의 내부로 들어가’며, ‘그 방에서 떨고 있는 나무’를 위해 ‘문을 걸어 잠그려다 말고 얼굴이 잘 보이는 높이에 작은 채광창을 그려주고 돌아’ 온다.
이처럼 시인은 현실을 닮았으나(물론 모든 문학 속 환상은 현실의 재현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이지 않은 공간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팽창하다가도 자리를 바꾸고 흩어지고 구겨 넣어진다(<입체안경>). 시인은 대상을 해체한다. 그리고 나서 유사한 것, 그리고 점차 유사해져 가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끊임없는 변형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변형은 창세기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듯 시 속에서 신이 된 시인이 대상을 가볍게 건드리면 대상이 스스로 움직이는 원리이다. 시인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대상들을 분리하고 해체시킨다.
앞선 황인찬의 시와 다른 점은 안희연의 심상의 범위가 더 크고 넓다는 점이다. 황인찬은 자신이 정한 범위 안에서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지만, 안희연은 조금 망설인다. 망설이는 와중에 시상은 흔들리면서도 끊임없이 그 폭을 넓혀간다. 이러한 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시는 <프랙탈>이다. 시 속에서 남자가 보던 영화 속에는 점자책을 읽는 여자가 나오고 점자책은 호주머니에 넣어둔 새를 잊어버린 채 숲에 간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는 호주머니 속에 있는 새 한 마리를 만지며 놀란다. 프랙탈은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구조’를 뜻한다. 즉 부분과 전체가 유사성을 가지는 구조를 말하는데, 나는 이러한 면모를 <나의 작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씨>에서 발견했다.
큰 문으로 들어가면 작은 문이 나오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다시 큰 문이 나오는
이상한 집에 대한 이야기도요
…
나는 오른손잡이이고 그는 왼손잡이이기에 그와 마주 앉아 있으면 거울을 앞에 두고 식사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의 작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씨> 中
이것은 데칼코마니이다. 반으로 접었을 때 페르난두 페소아 씨는 거울처럼 밥을 먹는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씨를 정면으로 마주 볼 것이다. 나는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 소설 중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돌고 돌아도 자꾸만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를 떠올렸다. ‘프랙탈’, ‘데칼코마니’, ‘뫼비우스의 띠’의 공통점은 대상이 가지는 유사 반복성이다. 유사한 것들을 찾아내어 반복하면서 그 제한된 범위 내에서 확장하려고 하는 시인의 창작법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창작 안에 고통을 감수하고 있을 시인의 모습을 생각했다. <파트너>에서 이 시집의 제목인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라는 문구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가슴속에 돌고 도는 프랙탈은 그의 삶으로 끊임없이 연속 생산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적이고 고독한 사유의 생산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