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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Mar 25. 2021

무질서에 관한 시집 노트 4

OE 시론 - 네 권의 시집을 논하다 4

[ CONTENTS ]


1. -


2-1.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2-2.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2-3.  김선재, 『목성에서의 하루』    

2-4.  이원, 『사랑은 탄생하라』    


3. -





3



3. 김선재, 『목성에서의 하루』    



『목성에서의 하루』는 시간의 원개념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전과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그 날 이후>) 현재 ‘남은 것’과 앞으로 ‘남을 것’ 안에 머문다. 즉 시인은 현재의 시공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인은 자꾸만 과거로, 미래로, 현재에서 멀어지는 시간으로 자리를 옮긴다. 옮기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그래서 시인의 ‘어깨는 무너지고’, ‘얼굴은 지워지고’ 사라지고, 없어지고, 기억을 잊어버린다. 되찾는 것만큼이나 잃어버리는 것도 아프고 어려울 텐데도 그에게는 경계가 없다. 

    




움직이지 않는 계단과 잃어버린 이름이 되살아나는 새벽 나는 떠나온 곳과 돌아갈 곳 사이에 앉아 있어요 쏟아진 물처럼 어제의 눈보라가 오늘을 지우며 지나갑니다 새들은 이따금 숲의 모서리를 허물며 날아가고 창밖은 만년설, 만 년쯤 흘러가면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도무지 어제의 나를 흘릴 곳이 없습니다 내일의 나를 주울 곳이 없듯이

<그린란드> 中

 


시인은 주체가 되어 ‘흔들지만’, 사물이 되어 ‘흔들리’기도 한다. <그린란드>에서 볼 수 있듯이 환승역에 선 화자는 ‘떠나온 곳과 돌아갈 곳 사이에 앉아 있’다. 떠나온 현재와 돌아갈 미래 사이의 공간은 시인이 재창조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숙명적’으로 머물러야할 공간이다. 





어떤 세계는 너무 작아
나는 목줄을 끌며 오래 생각한다
잔은 물을 규정하고 목줄은 삶을 규정하니까

<바람이 우리를> 中 


밤새 바닥을 더듬었다
무엇인가가 되지 않기 위해

<언덕들은 모른다> 中



 그러나 그것은 시인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의지’이기도 하다. ‘물을 규정하는 잔’처럼 ‘삶을 규정하는 목줄’을 오래 끌면서 시적 화자는 세계가 너무 작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되지 않기 위해’ ‘밤새 바닥을 더듬’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갈증이며, 결핍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인 삶의 의지로 나타난다.



… 파카르 담레이 마와르. 그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구름들의 미래.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이 조금 그리운 밤이다 … 우리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생이 있다. 먹어도 먹어도 쌓이는 생이 있다. 1인용 식탁 앞에 비가 내리는 1인용 식탁 앞에.

<1인용 식탁> 中



 한편 시인은 미래에 대한 예감 속에 살고 있다. 다리가 채 네 개가 되지 않는 1인용 식탁에 홀로 앉아 그는 ‘아직 오지 않은 생’을 생각한다. ‘파카르 담레이 마와르’와 같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태풍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구름들의 미래’를 떠올리며 ‘쌀밥을 꼭꼭 씹’는 와중에도 오지 않은 미래, 그 자신이 확장시킨 미래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그 자신을 ‘토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 독자는 현실과 무의식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현실감을 잃어버리는 독서 속에서 도서관에 앉아 타이핑을 하고 있는 시간들은 필자에게 몽롱하게 느껴졌다. 시 속에서 추상적인 공간은 모호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안으로 공간을 열어 나간다. 열고 닫히고, 갇히고 부풀면서 그 안으로 늘어나는 용수철처럼 무언가가 열리고 쉴 새 없이 창조되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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