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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Oct 31. 2020

인생의 여백도 괜찮아

여백도 아름답다

한국화는 여백이 그림을 더욱 아름답게 해 준다고 한다. 굳이 다 채우지 않아도, 그 여백 자체도 아름다움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난 여백이 두렵다. 무엇이든 빽빽이 가득 채우고 싶어 한다. 그림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난임 휴직, 나에게는 여백과 같은 시기이다. 사실 시험관 시술을 하며 열심히 살지만 노력한 결과는 여백과 같다.


난 그 여백이 두렵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에 멋진 그림을 채워갈 때에 왠지 난 텅텅 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텅 비는 것이 싫어, 이것 저것 몸을 부산히 움직인다. 필라테스를 하기도 하고, 책도 보고 가끔씩 용돈을 벌기 위해 다른 선생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집 옆 수변공원을 걷는다. 영산강 자전거길 왼쪽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산강이 흐르고, 오른편에는 갈대가 우거진 습지와 호수가 있다. 습지에는 가끔씩 거북이가 헤엄치는 것이 보인다. 호수에는 거위들, 오리들, 백로들이 헤엄치며 다닌다. 이런 자연이 바로 집 앞에 있는 것은 큰 선물이다. 그 자연을 보면 힐링이 된다. 강과 호수를 볼 때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가 생각난다. 내가 소로가 되어 월든 강을 거니는 것 같다. 그가 느꼈을 평화로움, 세상 이치에 대한 사색을 나의 사색으로 가져와본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다 보면, 조급한 마음, 쫓기는 마음에서 놓여난다. 그리고 자연의 광대함과 경이로움 앞에 평화를 찾는다. '그래, 꼭 뭔가를 바쁘게 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자연을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란 생각을 하며 걷는다. 햇볕에 반짝이는 강의 잔물결은, 어떤 화려한 조명이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을 반사시킨다. 미세먼지 없는 파아란 하늘과 구름에 내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강은 하늘을 닮았고, 하늘은 강을 닮았다. 거기에 걷고 있는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경쟁이었다. 대회를 나가도 경쟁, 시험을 쳐도 경쟁, 선생님이 되는 것도 경쟁, 선생님이 되어서도 경쟁 아닌 경쟁을 해 왔다. 타인과의 경쟁을 교묘히 내 과거 자신과의 경쟁으로 치환해 두었지만, 실은 그것도 경쟁은 경쟁인 것이다. 성장에 대한 강요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치열한 경쟁, 성장에 대한 압박 가운데 너무 지쳐있었던 것 같다. 도태되지 않고 싶고, 사회에 잘 적응하고 싶고, 실력을 키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마음이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여백 없는 삶으로 날 몰아갔던 것 같다.


삶을 살다 보면 으레, 당연히 해내야 한다고 생각되는 삶의 과제들이 있다. 학생 때는 공부를 잘해야 하고, 좋은 대학을 가야 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을 해야 한다. 결혼을 하면 자녀를 낳고, 자녀를 낳고 나면 훌륭하게 키워야 한다. 나름 삶의 과제에 충실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자녀를 낳는 것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삶의 과제는 누가 정해 놓은 것인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삶을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각자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는대도, 꼭 하나의 길을 강요하는 것은 어쩌면 폭력일 수 있다.


모든 그림이 똑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그림엔 이 쪽에 여백이 있다면 다른 쪽에서는 찬란한 빛깔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그림은 여백 속 단 하나의 점 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각자가 그림을 그려가는데, 내 그림을 타인의 그림과 똑같이 그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 인생의 그림을 살펴본다. 아직 미완성이고, 서툴고 부족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그런 색깔과 모양도 전체적인 큰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데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는 여백을 그리는 해인가 보다. 여백이라고 노는 거 아니다. 난, 여백을 최선을 다해 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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