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일기를 쓰다
감사일기를 2017년부터 쓰고 있다. 2017년은 내게 쉽지 않은 해였다. 근무지를 옮기고 새롭게 적응하면서 박사과정을 병행해야 했던 해였다. 2016년, 무리한 스케줄로 이미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고, 자궁에 용종도 있는 상태라 2017년에는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도, 공부도 쉴 수 없었다. 동학년에서 막내 교사인지라 공개수업도 해야 했고, 업무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 지인이 내게 감사일기를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처음 쓴 감사일기는 2017년 3월 29일 감사일기이다.
1. 오전에 교과전담 선생님 수업 2시간이 있어 수업준비도 할 수 있고 대학원 과제도 할 수 있음에 감사
2. 수학 수업시간, 아이들이 집중해서 열심히 공부해 주어 감사
3. 캠페인 판을 아이들이 자원해서 만들어 주어 감사
4. 학생들을 하교시킨 후,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는 시간 감사
5. 남편과 저녁식사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
6. 엄마의 사랑이 담긴 전화와 격려에 감사
7. 컨디션이 조금씩 좋아짐에 감사
8. 불평 대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에 감사
난 투덜이, 찡찡이다. 투덜대는 것도 많고, 찡찡댈 때도 많다. 워낙 눈물도 많고, 불평도 많은지라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울감이 커서 개인상담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잠들기 전 생각이 감사할 것들로 기억되니 아침에 일어나서도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삶은 여전히 힘겹고 버거울 지라도, 감사일기를 쓰니 인생의 굴곡을 감당할 힘이 생겼다. 어려운 시기 때마다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유산했을 때는 수술 후라 정신이 없었다. 수술 후 회복 과정에 쓴 감사일기(2018년 4월 18일)이다. 그 당시 소파술 후, 임신 호르몬 수치가 잘 떨어지지 않아 일주일마다 피검사를 해야만 했다.
1. 오전에 버스 타고 광주 가는 길, 많이 피곤하지 않게 지켜주심 감사
2. 오전에 병원 가서 피검사하고, 오후에 피검사 결과 호르몬 수치가 많이 떨어져서 감사
3. 오후에 피곤해서 쉴 수 있는 시간 감사
4. 저녁에 대학원 수업하며 3시간 동안 앉아있기 힘들었지만 아프지 않고 잘 해내 주어 감사
5. 저녁에 남편이 원래 오는 날이 아닌데, 광양에서 저녁도 안 먹고 늦은 시간 와 주어 감사
6. 남편과 늦은 저녁밥 먹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 감사
7. 엄마의 사랑으로 몸이 많이 회복되었음에 감사
아빠가 폐암 말기로 아프시던 시절 당시 썼던 감사일기이다. 길게 쓰지 못하고 자투리로 조금씩 쓸 때도 있다.
2019년 7월 21일 일요일
*아침 일찍 쉬지도 못하시고 아침밥 준비해주신 엄마께 감사
*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예배 후, 집에 심방 오셔서 아빠를 위해 기도해 주심에 감사
*태풍이 잠잠해져 남편이 비상근무 가지 않아도 되어 감사
2019년 7월 22일 월요일
*아빠가 어제보다 덜 아프시다고 하셔서 감사
*학교일 감당할 수 있어 감사
2019년 7월 23일 화요일
*통지표 뽑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어 감사
*교실 바닥 공사로 짐을 옮겨야 하는데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어 엄두가 안 난 상황 가운데, 남편이 와서 짐 싸주는 것 도와주어 감사
...
2019년 9월 21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친정에 갈 수 있어 감사
*운전하면서 졸렸는데 휴게소에서 쉴 수 있어 감사, 안전하게 도착해서 감사
*엄마, 동생과 맛있는 점심 먹을 수 있어 감사
*아빠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어 감사
*병원에 방문해 준 이모, 이모부께 감사
*엄마께서 이모들과 저녁 드시고 집에 가서 쉴 수 있게 해 드려 감사
*엄마 친구분께서 맛있는 복숭아를 주셔서 가족과 나눠먹을 수 있어 감사, 맛있게 복숭아를 깎아 준 동생에게 감사
*저녁때 죽과 포도,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감사
*동생과 내가 아빠 저녁에 간병하는데, 동생이 아빠를 정성껏 간병해주어 감사
*간병 연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감사
*고난을 통해 성숙함에 감사
*간호사실이 통합 병동인데 간호사실이 바로 옆에 있어 감사
*아빠가 30분~1시간마다 깨셔서 화장실에 가시지만 척추를 버티실 수 있어 감사, 의식이 선명하셔서 감사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주셔서 어려움을 같이 헤쳐나가게 하심 감사
그렇게 아빠를 보내는 어려운 시기를 버텼던 거서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음이 참으로 감사하다. 가족들 사랑을 받으며 아빠가 천국에 가셔서 남아있는 가족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아빠 장례를 치른 뒤 학교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일주일 동안 보이지 않던 선생님이 돌아왔다고 써 준 학생의 편지가 너무나도 감동이 되었다.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힘들었던 시기에 어떤 감사일기를 썼는지 궁금해 시험관 시술 당시의 감사일기를 읽어봤다. 만약 그 시기에 좌절감을 안고 잠에 들었다면 마음속의 쓴 뿌리로 남아있을 텐데, 감사일기를 써 놓고 시간을 돌이켜 보니 감사가 영롱하게 남아있다.
2020년 2월 21일 금요일
*난자 채취 전 주의사항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간호사 선생님께 감사
*난자 채취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아 감사, 시술하시는 원장님께서 시술에 능숙하셔서 감사
*난자 채취 후, 소고기를 먹으며 회복을 위해 영양에 신경 쓸 수 있어 감사
*이온음료와 여러 먹을 음식을 사 준 남편에게 감사
*집에 왔는데 몸의 회복이 빨라 감사
*저녁에 추어탕 1인분을 샀는데, 남편과 나눠먹기 충분한 양이어서 감사
*우유에 새싹보리 가루를 타 준 남편에게 감사
2020년 2월 22일 토요일
*난자 이식이 어렵다는 연락이 와서 좌절되었지만 여러 후기들을 읽으며 희망이 생겨 감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준비하는 시간 감사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어 감사
*친구의 연락 감사
*주말이라 남편과 푹 쉬며 보낼 수 있어 감사
*코로나로 혼란한 시기이나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
난임으로 가끔씩 우울해지고, 불평이 들 때도 있지만 다시 감사할 일들을 떠올려 본다. 사실 인생 자체가 선물이고 내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은 주변에 너무나도 감사한 분들의 사랑과 도움 덕분이다. 감사한 일들을 떠올리니, 마음의 짙은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이 비치는 듯하다. 감사는 마음의 비타민이요, 힘든 인생을 지나갈 때 우산이 되어 주는 듯하다. 난임으로 고군분투 중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감사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내 인생을 '감사'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