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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이아저씨 Oct 27. 2024

라고스행 기차

당신을 기억할때9

완행기차 차창 너머로 수피가 조금씩 벗겨진 코르크 나무들이 지나간다. 

우리의 맞은편 손녀와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안경을 쓴 채로 독서 중이다.


햇살이 노란 빛이다. 오래된 기차는 덜컹거린다. 간간히 지나치는 집은 초록과 분홍이다. 

너는 내 옆에 청록색 목티를 입고 내 어깨에 기대 곤히 자고 있다.

연말 분위기의 리스본을 너무 오랫동안 걸었던 탓이다.

나는 쌕쌕 곤히 자는 너의 모습이 참 좋다.


기차가 다시 또 덜컹거린다. 알 수 없는 포르투갈어로 방송이 나온다.


화들짝 놀라 잠에 깬 너는

잔 적이 없다는 것처럼 책을 급히 꺼내든다. 

아마 기차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겠다는 너의 다짐 혹은 로망을

조금이라도 실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릴 때가 되었다. 


간이역마냥 작은 역을 나서면 바로 요트들이 

가지런히 서있는 선착장이 나온다.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걸 보니, 바다는 맞다.


남부지만 계절은 겨울이라 바람이 차다.

너는 청록색 목티에 흰색 비둘기 같은 털옷을 걸쳤다.

신난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서 뛰어가

마그넷을 파는 가게에 이미 관심을 빼았겼다. 


보통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여행경로를 짜지 않는다. 

리스본에서 기차로 4시간, 남부 저 끝 라고스까지 갔다가 

다시 북부 저 끝 포르투까지 7시간 동안 기차를 타는 일정은

어떤 여행책에도, 여행 블로그에도 없던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라고스를 꼭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겨울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남부해안의 따스함은 없을거라 분명히 얘기했으나

그런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은 PRAIA DONA ANA 우리나라 말로 도나아나해변이었다.


우리는 노랗고 붉은 바위와 절벽으로로 가득찬 PRAIA DONA ANA를 향해 걸었다.

화성에 처음 발을 내딛는다면 아마 이런기분일까. 

외계행성에 온 것 같다며, 신나게 돌들을 타고 넘어 해변에 다다랐다. 


한국의 겨울을 생각하면 안되지만

그래도 겨울이었다. 바람은 찼고 거셌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닥뜨리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신이 난 너는 

여전히 초록색 목티에 흰색 털옷을 걸치고는

신발과 양말만 벗고 흰색 비둘기마냥 퍼덕이며 해변을 뛰어다녔다. 

검은 털옷을 걸치고 있던 나도 너와 함께 해변을 뛰어다녔다.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겨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차가워지고, 더욱 거세졌지만

우리는 이대로 숙소로 들어갈 수 없었다. 

더 앞으로 나아갔다. 


노랗고 붉은 절벽이 끝없이 펼쳐졌다.

저멀리 있는 흰색절벽도 석양으로 노랗고 붉게 변해버렸다.

온세상이 노랗고 붉었다. 


"이 절벽너머는 어느나라의 이름이 붙은 작은 바다가 아니다.

대양이다. 대서양이다. 유럽인들이 몇천년을 넘지 못하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여기 절벽에서 우리가 발을 헛디뎌 20M 아래로 떨어진다면 대양에 빠지는 거다.

저 파도를 봐라. 분명 살기 힘들 거다"


나는 마치 대서양의 바람에 홀린듯 이상한 얘기를 해댔고, 

너는 그냥 울타리에 기대 가만히 바람을 맞았다. 

머리칼이 저 멀리까지 휘날렸다.


2019년 12월 포르투갈 라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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