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선약수 Dec 03. 2020

"아빠가 돈 버는 기계야?"

남편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물었다

7살 둘째를 야단치던 남편.

훈계를 늘어놓다가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열이 오르는 듯 보이더니 급기야 아이 앞에서 큰소리로 폭발하고 말았다.

"아빠가 돈 버는 기계야?"


10년 전, 남편은 그렇게 절규(?)했다.

일곱 살이던 둘째는 아빠가 자신을 앉혀놓고 화를 내자 이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꺼이꺼이 겨우 울음을 참아가며 아빠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는데 아빠가 난데없는 질문을 날린 것이다.

겁에 질려 울면서도 둘째가 대답을 했다.

"아뇨"

"그럼 뭐야? 이 집에서, 아빠는 도대체 뭐야, 어?"

"아빠는...(흑흑) 돈 버는 사람! 이요"

"!!!!!!!!!!!"


딸을 둔 대부분의 아빠들이 '딸바보'를 자처하듯, 남편 또한 '딸바라기'라 부를 정도로 딸 사랑이 지극하다.


첫째를 낳아서 키울 때는 남편이 줄곧 아이를 데리고 바닥에 잤다.

나는 엄마라는 의무와 책임감에 아이와 놀아주며 힘들어했지만, 남편은 아이 눈높이에서 온몸을 던져 뒹굴며 같이 즐겁게 놀았다.

남편 회사가 학교보다 먼저 주 5일 근무를 도입했을 때는, 토요일마다 혼자 아이를 데리고 놀이동산이며 동물원을 다니는 친구 같은 아빠였다.


그런 남편이지만 보수적이고 엄격한 시아버님 밑에서 자란 탓인지 가부장적인 면이 있었다. 특히 훈육방식에 있어서 그랬는데, 한 번씩 화가 나면 애들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무섭게 야단을 쳤다.


나는 자라면서 엄마의 잔소리는 들었을지언정, 아버지가 큰소리로 나를 혼내셨던 적이 없었기에, 남편이 아이들에게 그럴 때마다 질겁을 하며 내가 못 견뎌했다.


그러나 남편이 아이를 야단칠 때 옆에서 내가 끼어들면 남편의 화만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아이를 혼내려다 결국 부부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남편의 훈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참아야 했다.


내가 엄마로서 아이를 혼낼 때도 감정이 앞서기 일쑤라 별반 다른 게 없으면서, 남편을 보고 있자면 '저렇게밖에 못하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 당장 한 마디 하고 싶어 지는걸 겨우 참곤 했다.


그런데 문제의 그날, 남편은 일곱 살 딸에게 깨끗한 KO패를 당했다.

'아빠가 돈 벌어 오는 기계야?'라는 '우문(愚問)'으로 활화산 분출의 절정으로 치달았던 순간,

'아빠는 돈 벌어 오는 사람이요'라는 어린 딸의 '현답(賢答)'주방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던 내가 웃음을 터뜨렸고, 남편도 말문이 막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화난 표정을 풀자, 영문을 알 턱이 없는 딸이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리고 말았다

아빠는 언제 화를 냈던가 싶게, 우는 딸을 안고 달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 집에서, 아빠는 도대체 뭐야?'라고 외쳤던 남편,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 딸들로부터 가장(家長)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권위의식이 아닌, 남편으로 아빠로 존중받기를 원했다고 난 생각한다.


남편은 퇴근해서 집에 오면 가족이 모두 뛰어나 반겨주기를 바랐고, 늦은 저녁을 혼자 먹게 되더라도 아내나 아이가 식탁에 함께 앉아 그날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어 했다. 남편은 그런 것으로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런데 남편이 폭발한 그 날, 퇴근해서 들어오는 남편을 맞아주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제 할 일에 빠져 있었고, 나도 남편과 한창 신경전을 벌일 때라 무심했다.

아내가 대충(?) 차려주는 저녁을 먹으며 놀고 있는 둘째를 불렀는데, 여러 번 불러도 둘째가 아빠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섭섭해도 꾹 참고 식사를 마친 남편이 둘째에게 다가가 오랜만에 '같이 놀기'를 시도했지만, 둘째의 말투나 행동이 버릇없고 제 멋대로였다.


처음엔 조용히 타이르던 남편도 점차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더니 급기야 아이에게 똑바로 앉을 것을 '명령'했고, 그때부터 일곱 살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일장 훈계'가 이어졌다. 그러다 감정이 점점 고조되어 결국 폭발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둘째와 있었던 그 날의 일회성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땅 속에서 지판들의 이동이나 충돌에 의해  마그마가 형성되고, 거기서 가스가 계속 발생하다가 그 압력을 지표면이 견디지 못할 때 결국 폭발하는 것처럼...



남편이 변했어요!

둘째가 네 살 되던 해, 남편은 골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답답하다 여겨질 정도로 가족 하고만 시간을 보내던 남편에게 '골프'라는 관심사가 생겼고, 급속히 빠져들었다. 골프는 내 남편을 바꾸어놓았고, 평화롭던 우리 집에는 자주 긴장감이 흘렀다.

둘째가 많이 허약했기에, 직장을 다니며 아이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여겨질 때였다.  


남편은 퇴근한 저녁에도 골프연습장을 찾아 2~3시간 맹연습을 했고, 경제적 부담감으로 필드는 가끔이었지만, 필드를 나가지 않는 주말에 어김없이 골프연습장을 찾았다. 레슨 한 번 받지 않고 혼자 책을 읽어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골프가 크게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남편은 연습장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체중을 10kg 가까이 줄였고, 생전 처음 식스팩도 가지게 되었다.

남편이 얼마나 골프에 공을 들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식스팩을 자랑하는 남편이 얄밉기만 할 뿐, 남편의 취미활동을 인정하고 응원해주기엔 당시 내가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상대적인 박탈감에 화가 나서 남편에게 짜증을 내는 빈도가 늘어가고 있었다.


내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며 잦은 말다툼을 하니, 아이들도 심리적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가 아빠를 대하는 냉랭한 태도를 아이들도 은연중에 학습했나 보다. 엄마가 아빠에게 불만을 늘어놓을수록 아빠는 아이들에게도 못난 사람이 되어갔다.


예민한 아내의 눈치도 봐야 하는데, 아이들마저 아빠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테고, 남편이 원했던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가장(家長)'이란 소박한 바람은 추풍낙엽이 되어 뭇발길에 차이고 짓밟히는 기분이었으리라.

 사진 출처: Faxnet

그렇게 골프로 촉발된 부부갈등은 가정에서 '아빠의 설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었고, 몇 년 동안 갈등의 골이 깊어지다가 결국 남편은 가족에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묻는 절규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집에서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라고.

그런데 왜 하필, 그 '철학적 질문'의 직접 대상이 7살 둘째였을까마는..;;


비록 번지수를 잘못 짚은 질문이었지만, 내가 그 현장에 있었으므로 남편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전까지 나만 힘들고 억울하다 생각하며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만 커져가고 있었다. 남편이 하는 모든 말들이 자기변명처럼 들렸는데, 그날 남편이 내뱉은 '한 마디'가 내 가슴에 와 꽂혔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 '처음'이었던 것 같아"


남편은 필드를 나가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 연습장에서 연습에 집중하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처음 느끼고 가져보는 행복감'이라는데, 그건 마치 조강지처 앞에서 '운명의 새로운 사랑을 만나 너무 행복하니, 당신이 이해해달라'는 '커밍아웃'처럼 들렸다.

'사랑의 대상'이 여자가 아닌, '골프'였을 뿐.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하면, '골프 연습에 집중하는 혼자만의 시간'이 남편을 행복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 자리에서는 '나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거든~'하며 남편의 말을 되받아쳤지만, 진솔한 그의 말이 계속 가슴에 남았다. 

남편은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하고픈 것을 맘껏 하며 자란 편이다. 막내 찬스도 있었고, 부모님도 허용적이셨다.

그러나 남편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부모님 뜻'이 '자기 것'인 채로 살아왔다.


결혼 이후에는 남편, 아빠로서 가족과 함께 하려고 노력했고, 그것만이 최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골프 연습을 하면서 그제야 '새로운 행복'에 눈이 뜨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 또한 취미생활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지만, 결혼 전에는 실컷 누렸던 터라 남편이 느끼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늦바람이 무섭다던데... 그런 행복을 마흔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되다니...'

그제야 '혼자만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셔본 남편이 짠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우리의 갈등이 바로 봉합된 것은 아니다.


그해 겨울, 남편의 '골프 외도'에 나는 '스키 맞바람'으로 응수했다.

아이들까지 떼놓고, 동료 선생님들과 홋카이도로 스키여행을 떠난 것이다. 남편이 골프를 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일본까지 혼자 스키여행을 갈 배짱을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홋카이도 후라노(Furano) 스키장 정상에 서서 눈부신 설원을 내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인적은 드물고 아무도 밟지 않은 슬로프 위로 내가 길을 만들며 활강을 시작하니, 드라이 파우더가 눈꽃으로 날리고 그 황홀감에 눈물이 났다.

'아, 남편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나는 '스키 맞바람' 끝에 비로소 남편을 이해하고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남편의 골프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나의 맞바람도 여행지와 성격을 달리하며 계속되었다...


가족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해야 한다며 나의 발목을 잡았던 남편이, 골프 때문에 다소 못마땅한 아내의 독자적인 행동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자유로운 취미활동을 인정하고, 나 또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 남편을 향하던 불만의 잔소리가 줄고 아이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깊어지던 부부간 갈등의 골도 차츰 메워지며, 우리 가족은 각자의 자리 안정을 되찾아갔다.


간관계에서 자기 자신이 충만할 때면 타인에게 큰 기대를 갖거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러면 오히려 누구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서로 아껴주되, 과도한 기대나 의존은 하지 않는, '아름다운 거리'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두 아이는 서울로 떠나 생활하고, 집에는 우리 부부만 남았다.


오늘은 일명 '코로나 수능'이 치러진 날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도 수능 시험장이었는데, 나는 수능시험의 방송 시나리오를 담당했다.

매교시 시험 시작 전,

" 수험생은 문제지 표지에 제시된 '필적 확인 문구'를 답안지의 '필적확인란'에 정자로 기재하십시오"라는 멘트가 나간다.(수험생 본인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


올해 제시된 필적확인문구는 나태주 시인의 시, <들길을 걸으며>에서 인용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이었다.


필적확인란은 부정행위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목적이지만, 매시간마다 적어야 하는 만큼, 수험생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는 문구로 신중하게 선택된다고 들었다.


나는 그 문구를 보면서 생각했다.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 의미가 뭐냐고 물었던 남편에게,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바로 당신!'

이라고 하면 대답과 위로가 될까?


50살까지의 첫 번째 우리 인생이 나보다는 가족을 위해, 생존을 위한 성격이 강했다면, 50살 이후의 두 번째 인생은 우리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었으면 한다.


우리 부부는 막 쉰의 고개를 넘었으며, '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에 더없이 좋은 나이'!! 



"그런데 여보, 아직은... 돈   더 벌어와야 하지 않을까??ㅎㅎ"



<표지 그림출처: 노트 폴리오>







매거진의 이전글 이 결혼 엎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