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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선약수 May 26. 2020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256호의 붕괴 조짐

21년 차 워킹맘, 베트남에서 전업주부로 살기(3)


2010년, 민간 교육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꿈꾸는 우리 집 문패달기 1만 가정 운동’을 시작했다.


신문에서 기사를 접하고 나는 바로 신청했다. 문패 신청뿐 아니라, 단체에 매달 작은 후원금도 보내기로 했다.


마침 큰아이가 중1이 되었고,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사교육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많이 봐온 터라 내 아이는 그렇게 키우지 않으리라 일찌감치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우리집 문 앞에 달려 있는 256호 문패.

문패달기 운동은 문패를 바라볼 때마다 잘못된 사교육 정보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고, 이웃들과 뜻을 함께하자는 취지였다. 또 문패달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꿈꾸는 8가지 약속’을 지킬 의무도 주어졌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꿈꾸는 8가지 약속
1. 우리 가정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오기를 꿈꿉니다.
2. 우리 가정은 불필요한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않겠습니다.
3. 우리 가정은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갖도록 힘쓰겠습니다.
4. 우리 가정은 아이를 성적으로 비교하지 않겠습니다.
5. 우리 가정은 아이들이 꿈과 적성을 따라 진로를 선택하도록 돕겠습니다.
6. 우리 가정은 사교육 걱정을 부추기는 이웃이 되지 않겠습니다.
7. 우리 가정은 <아깝다 학원비!> 소책자 정보를 이웃들에게 알리겠습니다.
8. 우리 가정은 뜻을 같이하는 가정 및 기관과 함께하겠습니다.
사교육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설명한 소책자

(단, 여기서 사교육을 절대 안 시키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길. '불필요한 사교육'을 지양하는 것일 뿐, 경우에 따라 적절한 사교육은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가슴에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 '이름'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고 함부로 행동하기 힘든 것처럼, 나 또한 문패를 집 앞에 떡 붙여놓았으니 오갈 때마다 보면서 흐트러지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큰아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256호 집'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실천 약속을 잘 지킨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를 남들보다 잘난 아이로 키우겠다, 반드시 명문 대학에 보내겠다.'

이 생각만 버리면 의외로 실천은 어렵지 않았다. 


내 아이가 행복하다고 느끼며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성적 올리기 위한 공부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하며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큰아이의 경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믿을 만한 단체가 주관하는 자기 주도 학습캠프, 독서 캠프, 자연체험 캠프 등 다양한 캠프에 많이 보냈다.(부모와 아이가 함께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적이겠지만, 나의 경우 일하느라 바빠서 아이만 혼자 떠나보내는 방법을 많이 썼던 것 같). 

또, 사교육비를 절약한 돈으로 방학이면 두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노력했다.


큰아이가 중학생 되고부터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고, 책임 또한 스스로 져야 함을 강조했다.

나름 아이를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키우는 '쿨한 엄마'라고 은근 자부심도 있었던 것 같다.

큰아이 대학 입시 결과도 나쁘지 않게 나오자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꿈꾸는 256호'는 실제 그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듯도 했다....




큰아이를 대학에 보내 독립시키는 것으로 자식농사 1 모작은 마무리.

이제 베트남으로 왔으니 여기서 제2탄, 둘째의 2 모작 작업에 착수하면 되었다.


그런데 남편의 근무지가 있는 베트남 하이퐁에는 초등 6학년인 둘째를 보낼 학교가 현지 학교 외에 마땅치 않았다. 학교 다니는 연령의 아이가 있는 하이퐁 주재원 가족들은 대부분 하노이에 집을 얻고, 남편들은 주말에 차로 편도 2시간 거리의 하이퐁과 하노이를 오가며 주말부부, 주말 가족으로 지내고 있었다.


하노이에는 한국 학교와 외국계 국제학교도 다양하고, 우리 교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한인타운과 그에 따른 인프라도 잘 구축되어 있는 편이다. 한 마디로 아이의 교육문제와 생활의 편리함 때문에 해외까지 일하러 온 남편들이 주말부부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남편 또한 나와 아이를 위해서 하노이에 집을 구하고, 둘째를 국제학교에 보내자고 했다.      


남편이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될 것 같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난 격하게 기뻐했더랬다. 직장생활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고 지쳤던 터라, 어떻게... 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로 갈 것 같은데?”

“아직은 몰라, 주재원 연수 과정을 다 마쳐야 알 수 있을 거야”

“난 인도, 아프리카라도 좋아. 휴직만 할 수 있다면 지구 어디라도 따라갈게~

(일자리를 찾는 많은 구직자들에겐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 같아 정말 죄송하다...)


아프리카 오지라도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했던 내가, 전업 주부로 ‘진정한 내조’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며 큰소리 땅땅 쳤던 내가, 막상 휴직을 하게 되자 말을 바꾸면...

나와 아이가 좀 더 편하자고, 아이 교육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남편은 하이퐁에서 고생하며 일하는데 우리만 하노이로 가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내 마음도 다를 바가 없었다.

평소 ‘교육 문제’에서 만큼은 남 눈치 보지 않고 ‘소신’을 강조했던 나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어물쩍 ‘대세’(하이퐁 주재원 가족들이 남편과 떨어져 살며 아이를 하노이의 학교에 보내는 것)에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며 애써 합리화도 했다. 남편의 뜻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순종적인 아내로 포장하면서...

 

가족생활의 주거지를 하노이로 결정하고 나니, 하노이에 살 집도 구해야 했지만 그보다 아이의 학교를 결정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첫째 아이였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문제다.

'넌 어떤 학교에 가고 싶니?' 물어보고 결정하면 끝날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둘째는 좀 다르다. 첫째랑 7살이나 터울이 나는 둘째는 힘들게 낳아서 어렵게 키운 아이다.(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


https://brunch.co.kr/@jsy1008/4


둘째는 6학년 나이가 되었지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어려워했다.

태어나 출발 자체가 늦었기에, 성장과정에서도 항상 또래보다 발달이 느렸던 아이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엄마가 아무리 '못 해도 괜찮아. 틀려도 괜찮아'라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주어도 아이 스스로 괜찮아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건강'이 최우선 순위였고, '또래만큼 자라기'가 목표였지, 언감생심 '공부 잘하기' 라니. 그건 우리에게 너무나 과분한 욕심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는 학교 숙제만 잘해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둘째를 베트남에서 어떤 학교로 보내야 하나... 고민했다.

나는 하노이 한국 국제학교보다는 외국계 국제학교로 보내길 바랬다.

이유는 단 하나,

'딸에게 공부 스트레스를 덜 주고 싶어서'


국제학교는 사실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한국학교와 그 교육은 잘 안다. 교사로서 이런 말을 하기 정말 부끄럽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행복하지 않다!!  특히 공부를 못하는 축에 속하는 아이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학교를 견디기 힘들어서 교사인 나도 결국 '휴직계'를 내고 도망치듯 이 곳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줄 세우기' 식의 경쟁 교육을 끊어내자는 캠페인 그림

둘째도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힘들어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집에 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둘째처럼 '친구들에게도 교사에게도 유령처럼 여겨지는, 관심 밖의 존재감 없는 아이들'이 제법 앉아있는 곳이 우리나라 학교 교실이다.


인터넷 카페 등에서 정보를 찾아 아이가 지원할 만한 국제학교 세 군데를 추렸다(인터뷰, 테스트 비용만 학교 당 300불 안팎이라 많이 지원해볼 수도 없었다. 학비는 개인이 부담하기엔 무척 비싸지만, 남편 직장에서 70%는 보조해준다고 했다).  각 학교의 입학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 인터뷰 날짜를 잡고 입학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테스트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입학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판단되는 학교부터 공략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남편은 일을 해야 하니, 낯선 땅이라 걱정은 되지만 혼자 아이를 데리고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하이퐁에서 하노이까지 한 번 다녀오려면 차로 왕복 4~5시간, 하루가 꼬박 걸리는 일이었다.


인터뷰한 첫 번째 학교에서 며칠 뒤 불합격 메일을 보내왔다. 입학을 허가하기에는 영어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영어가 안되니 수학 문제도 풀 수가 없었다. 아이가 테스트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서 폭풍 눈물을 흘릴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긴 했었다.

그래도 '아직 초등학생이니까 영어는 국제 학교 다니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거고, 무엇보다 그 비싼 학비를 내면서 다니겠다는데 설마 떨어뜨리겠어?'

우는 아이를 다독이며 불안한 내 마음도 달랬더랬다.


아~!

베트남에 도착한 첫 일주일은 정말 행복했었는데...


아이도 나도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호텔에서 뒹굴뒹굴,

앞으로도 쭉~~~ 여행 같은 즐거운 해외생활이 펼쳐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보 학교 세 군데 중에,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한 달 정도는 더 놀다가 학교 가는 게 좋겠지?'

아이랑 나는 세 학교에서 모두 합격통지서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김칫국부터 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처음 불합격 통지를 받고 너무 쉽게 생각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엄마가 제대로 몰라서 아이에게 상처를 줬구나...'


일주일 만에 분위기는 '놀자 모드(mode)에서 입시 모드'로 급반전!

한국에 있는 동료 영어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입학 테스트를 위한 도움을 청했다. 인터뷰할 때 자기소개만큼은 영어로 자신 있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초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영어가 전부인 아이에게 갑자기 영어 인터뷰 준비를 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침에 서로 파이팅을 외치고 웃으며 시작하지만, 아이는 울고 나는 화를 내는 것으로 번번이 마무리되었다. 밤에는 또 서로 안고 위로하며 '좀 더 나은 내일'을 꿈꾸어 보았지만, 우리의 다짐은 매번 물거품임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뒤 두 번째 학교 테스트와 인터뷰를 '최선을 다한 준비' 끝에 마쳤지만, 며칠 뒤 또 불합격 통지!

그쯤 되니 한국에서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지 않은 게, 베트남 오기 전 몇 주만이라도 인터뷰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무척 후회가 되었다.


부모가 교사라 해도, 아니 공자님이 다시 살아온다 해도 제 자식은 가르치지 못하실 게다.

그래서 세 번째 학교 테스트를 앞두고는 하이퐁과 하노이를 여러 차례 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학원에서 단 2시간의 수업을 받기 위해 왕복 4~5시간 차를 타는 수고로움을 감수했다.


그리하여

‘세 번째 학교에서 드디어 합격!’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256호’ 집은 건재했을 텐데...

그럼 나는 여전히 ‘쿨~~ 한 엄마’ ‘자유롭고 우아한 해외생활’을 즐길 수 있었을까?


'베트남에서 전업주부로 살기'

그 첫 번째 과제 해결부터 삐끗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올인(All in)' 했는데...

왜? 그래서 어떡해?



'본격적 붕괴'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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