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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고생하는 사서를 아십니까?

PART I_장소_1.한국은행 자료실

문헌정보학과 4학년 1학기가 되면 '실무실습'이라고 해서 예비교사들이 학교에 교생실습을 가는 것 처럼 다양한 분야의 도서관으로 학부생들이 실습을 나가게 된다. 실습처도 본인이 알아서 정해야하고 함께 실습을 나갈 사람도 정해야 한다. 나는 학부 단짝이었던 친구 두 명과 함께 '한국은행 자료실'로 3주간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학과 동기들은 대학도서관으로 실습을 나갔었는데 내가 선택한 한국은행 자료실은 무언가 있어 보이는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은행'이라는 곳이 금기의 장소처럼 궁금하고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 곳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000년도 새천년 밀레니엄이라며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던 그 해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총 3주간의 실무실습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단순히 지식으로만 배웠던 지식을 실무현장에 나가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엄청 설렜던 것 같다. 실습 나간다고 정장도 한벌 사 입었었다. 실습 첫날 나는 최대한 깔끔하게 차려입고 한국은행 건물 입구에서 출입 관련 기록도 남기고 방문증을 받아서 왼쪽 가슴에 달아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 자료실로 올라갔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설레기도 하고 이제 학교를 졸업하면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그랬다.


한국은행 자료실의 주요 업무는 한국은행의 조사, 연구 업무에 필요한 정보자료를 관리하고 해외 학술지와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외부 이용자는 거의 없었고, 한국은행 직원들만 이용하는 공간이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로 외부 이용자가 없어서 놀랐다.


정보자료실 팀장님이라는 분이 우리에게 3주간 많은 걸 보고 배우고 가라고 격려말씀을 해주시고, 자료실 직원 중 한 분이 우리가 3주간 하게 될 업무에 대한 일정표를 나눠주면서 설명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무자에게 실습생은 또 하나의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라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당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시고 이것저것 알려주시려고 애쓰신 한국은행 자료실 직원들에게 감사하다.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가 되면 퇴근하는 직장인 생활을 3주 동안 해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지하철을 타고 매일 명동까지 출퇴근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실습생이라고 적힌 목걸이였지만 대기업 직원들만 목에 걸 수 있는 출입증을 나도 3주간은 목에 걸어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한국은행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줄을 서서 점심을 먹는 시간도 재미있었다.

퇴근 후에는 한국은행 주변에 있는 명동이랑 남대문시장 등 주변 명소들에서 친구들과 하루의 일상을 나누며 잠시 내가 직장인이 된 듯한 사회인 기분을 느껴보기도 했다.


한국은행 자료실은 1953년 '도서 관리계'로 발족해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고재창 씨가 한국은행망의 새로운 분류법 즉 '한국은행 도서 분류법'을 따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분류표를 보면 100 총류, 200 자연과학, 300 공학, 공업, 400 산업, 500 사회과학, 600 예술, 700 어학, 800 문학, 900 역사로 나누어져 있다. 보통 DDC(Dewey Decimical Classification) 듀이 십진 분류표로 자료를 분류하는데 300, 400, 500번대가 DDC 주제 분류와는 다르게 금융자료나 경제자료 등으로 되어있었다. 또한 당시 소장하고 있는 한국은행 자료실의 장서 수는 15만권(단행본) 정도였고, 부정기 자료, 연속간행물(1,500여 종)이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연속간행물들을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언어도 한국어 이외에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방대한 자료를 보고 놀랐다. 이 모든 자료를 관리하는 정보자료실의 직원 수는 총 12명이었다.


각각 수서, 정리, 정보시스템, 참고 열람 업무로 나누어 일하고 있었으며 수서 업무는 자료를 수집, 등록해서 장서를 합리적으로 구성하는 업무로 자료의 선정, 수입, 등록, 제본, 제적 업무 등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리업무는 수서를 거친 자료들을 자관 분류법에 맞추어 분류하고 도서관리시스템에 입력하는 업무와 자료실에서 참고봉사를 하는 참고 열람 업무로 크게 업무 분장이 나누어져 있었다.


3주간의 실습은 1주차에는 도서관리시스템 관련 개요 및 운용과 네트워크 구성, CD-ROM 시스템 개요, Server 운용,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 검색 방법, PQD 법률정보, 학술정보 이용법, 편목 및 한국은행 분류법 개요, 도서 대출 및 반납업무, 도서 서가 배열법, 열람자에 대한 참고봉사, 금융경제 관련 웹사이트 탐색 및 목록 작성에 관련된 것을 실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접해보는 경제 관련 웹사이트와 법률정보가 들어있는 웹사이트는 알 수 없는 용어들로 가득 차 있어서 금융, 경제와 관련해서는 무지했던 내 모습을 들키는 것 같아서 침울했다.


2주차에는 단행본 도서 데이터베이스 내용 수정 및 보완하는 것을 배웠고, 3주차에는 정기간행물 등의 입력 및 등록에 관한 것을 실습했다. 무엇보다 실습을 하면서 내가 느꼈던 점은 이론으로만 배웠던 것을 현장에서는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과 외국어 실력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자 등 다양한 언어로 된 정기간행물, 연구보고서 등 언어의 보이지 않는 장벽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해독이 불가능한 매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서의 업무가 단순히 자료 정리나 대출업무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정보센터'로서 정보에 '소장' 보다는 '정보의 소재 파악'이 중요하다고 체감했다. 최소한의 정보를 갖고 어떤 방법, 방향으로 정보를 찾아서 이용자에게 제공해 줄 것인지가 사서들에게 있어 가장 큰 과제이며, 이를 잘 해결해 나가는 사람만이 유능한 사서라고 생각되었다. 이용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보를 그에 맞춰 제공해주어야 하는 것이 사서의 주 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습 마지막 날 과장님이 해주신 말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앞으로는 점차 '전자도서관'이나 '전자출판' 같은 개념이 등장하고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면 사서직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사서자격증만을 가지고 사회에 나오면 갈 곳이 없을 것이라고 겁을 주셨다. 사회가 많이 변화했다고 하시면서 컴퓨터와 중국어, 외국어 등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셨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과장님은 예지력과 통찰력이 뛰어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3주간의 실습이 끝나고 내가 느꼈던 것은 세상은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갖고 있는 외국어 실력이 참 형편없었다는 점과 컴퓨터 활용능력도 매우 떨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실습을 기점으로 나는 이후 본격적으로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였다. 4학년 2학기가 시작되면서 동기들 대부분이 취업준비가 시작되었고, 조기에 취업이 된 친구들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헌정보학과 졸업생 중에 전공을 살려서 도서관에 사서로 취업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97학번 동기들도 도서관보다는 일반 회사나 네이버 같은 당시에는 인터넷 정보검색과 관련된 회사로 취업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2001년 당시 한국에서 사서로 살아간 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뚫고 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1997년 IMF라는 국가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취업시장은 그야말로 꽁꽁 얼어붙었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도 어려웠고 도서관의 정규직 사서 채용공고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조급해지는 마음에 졸업을 앞둔 나는 우선 컴퓨터 활용능력 2급, 워드프로세서 2급, 인터넷 정보검색사,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졸업하기 전까지 취득하였다.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은 강남역에 있는 컴퓨터 학원을 등록하고 3개월간 학원을 다니며 취득하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무식하게 외우고 필기시험은 기출문제집과 실기는 학원에서 알 수 없는 암호들을 무조건 외우라고 해서 무작정 암기해서 단 한 번에 시험으로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때도 지금의 20대 청춘들처럼 취업준비로 스트레스 받으며 졸업하기 전 이력서에 다만 몇 줄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이것저것 다양한 자격증 공부를 했던 것 같다. 현장에 나와서는 그런 자격증들이 실무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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