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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스 Apr 05. 2023

자연은 언제나 옳다

영국 피크 디스트릭트

아니, 이렇게 볼 것도 없는 산은 왜 가는 거야? 재미없는데...


어렸을 적에는 자연이 도대체 뭐가 좋은 건지 몰랐다. 일단 내가 살던 곳에는 흔하디 흔한 것이 산과 밭이라서 전혀 특별함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들은 등산을 시간 내서 가끔 가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렇지도 않았다. 동네 뒷산을 언제나 갈 수 있었으니까. 그곳은 탄성을 자아내는 기암괴석이 있다거나 구경거리가 있는 산은 절대 아니다. 배드민턴 코트와 약수터가 전부인 곳이었다. 이런 산은 전국 어느 지방을 가나 하나쯤을 있을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곳이었다. (물론 약수터 물맛은 끝내줬다.) 이 동네 뒷산을 많이도 갔는데, 솔직히 부모님 따라간 것이다. 별 거 없는 산에서 조용히 정처 없이 걸으면서 나무만 내내 보고 오는 것보다는 부모님께서 당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던 아웃백이나 빕스에 가자고 말하길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자연 속 작은 마을에서 자라서 그런가. 언제부턴가 내 안에는 자연이 몸속 깊게 자리한 것을 느끼게 됐다. 서울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뒤엉켜 지내다 보면 점점 기가 빨린다. 사실 꽉 찬 지하철만 타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내 DNA가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서울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난 후 경기도로 향하는 버스 안, 창밖을 보면 건물이 하나둘씩 사라지며 길거리가 어둑어둑해진다. 점점 울창한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갈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원래 내가 서울에서 살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 서울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라왔고 아직도 경기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자라온 곳에 큰 영향을 받았구나 싶다. 물론 간절하게 서울에 살고 싶다는 게 모순이다. 편의시설은 둘째치고 대한민국의 교육과 일자리는 서울에 몰려있다. 그래서 경기도에서 매번 왔다 갔다 하는 게 참 힘들다... 경기도민의 설움이란... 그동안 계속 대중교통을 타느라 내 소중한 시간을 길바닥에 너무나도 많이 내다 버려서 경기도 살이가 이제는 완전히 신물이 나버렸다. 그럼에도 가끔은 경기도만의 자연이 좋고, 그게 나에게 필요할 때가 있다. 


 어린 시절 서울을 동경했던 나는 오히려 크고 나서야 우리 동네의 자연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고,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은 지금은 의식적으로 자연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주로 심신이 지쳤을 때 동네에 있는 공원 산책을 한다. 나는 집에서 특별하게 하는 취미 생활은 없고 주로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많이 본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모니터조차 쳐다보고 싶지 않을 때는 밖을 조금 걷다가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자연은 나를 치유해 준다. 집에서 나가기 전에는 귀찮은데 나가지 말까 싶다가도, 막상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다가 들어오면 나갔다 오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마다 항상 하는 생각은 바로 “자연은 언제나 옳다”였다.


 영국에 와서는 한국에서 느꼈던 자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자연 속에서 힐링을 하고 왔다. 이름 하여 피크 디스트릭트(Peak District). 영국에서 중간고사 기간을 맞이해서 한동안 매일 학교 도서관에 갔다. 한국에서와 다르게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리포트를 쓰는 게 진이 빠졌다. 한국에서는 시험공부를 할 때 수업 때 사용됐던 ppt 슬라이드에 나와있는 내용과 수업 때 필기했던 것을 단순히 외우기 바빴는데, 여기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학업 능력을 평가한다. 전공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내가 듣는 모든 과목에서 리포트를 써야 했다. 물론 전부 영어로. 한국과는 다른 스타일의 학업 평가 방식에 대처하느라 나름 고생해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던 찰나에 기숙사 같은 플랫에 사는 친구가 피크 디스트릭트로 하이킹을 가자고 했다. 귀찮긴 하지만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 친구의 말에 응했다. 친구가 가자고 한 것이라 나는 피크 디스트릭트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아서 어떻게 생긴 곳인지도 모르고 갔다. 어떤 곳인지도 모르다 보니 그 어떤 기대도 안 하고 방문했는데, 역시나 오늘도 “자연은 언제나 옳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에 더해 “살면서 내가 이런 곳에 와보다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참 경이로웠으며, 자연 앞에서 작아짐을 체험한 곳이었다.


꿈속 어딘가에 온 듯한 피크 디스트릭트 속 초원


피크 디스트릭트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으로, 크기가 너무 커서 여러 주에 걸쳐져 있지만 대략 잉글랜드 북부의 대도시인 맨체스터와 셰필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곳은 규모가 워낙 방대해 하이킹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너무나도 많다. 그중에서도 나는 윈 힐(Win Hill)이라는 언덕으로 향했다. 피크 디스트릭트의 많은 뷰포인트 중 내가 머물고 있는 셰필드에서 가까운 편에 속하는 곳이었다. 셰필드 대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약 30분 간 가다가 피크 디스트릭트의 한 주차장 앞에서 내려 레이디바워 댐(Ladybower Dam)부터 본격적인 하이킹을 시작했다.


레이디바워 댐 - 하이킹의 시작


 음... 피크 디스트릭트가 한국과 다른 점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경로가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지 않다. 한국은 웬만한 산을 가면 산의 약도, 어느 봉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km 수를 알려주는 팻말, 그리고 여러 방면으로의 화살표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 주차장만 떡하니 있고 등산로의 입구도 제대로 없었다. 그래서 길을 직접 만들어서 가야 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당시 계속 서쪽으로 가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나와 친구들은 윈 힐이라는 목적지만 가지고 산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비가 오고 난 뒤라 질퍽해진 땅을 실컷 밟고, 경사 급한 산을 오르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피하느라 출발한 지 30분도 안 돼서 옷은 걸레짝이 됐다. 난 분명히 가볍게 하이킹을 온 건데 한국에서도 해본 적 없는 야생 등산을 해보니 무진장 당황했다. 하이킹의 초반에는 괜히 왔나 싶기도 했다. 이렇게 거친 산행은 예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숲을 헤치고 언덕 쪽에 다다르니 그때부터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한국과는 다르게 산을 올라도 빽빽한 아파트 단지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문명사회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이게 진짜 자연이구나 싶었다. 윈 힐까지 다 오지도 않았는데 이런 절경을 목격하게 돼서 갑자기 신났다. 그리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설레기 시작했다. 중턱의 경치가 이 정도인데 정상인 윈 힐에 도착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이려나 싶었다. 너무 감격스러운 풍경 앞에서 이때부터는 거친 하이킹의 피로도 말끔히 잊어버렸다. 흙으로 뒤범벅된 신발과 바지도 상관없었다. 이런 풍경을 볼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옷은 더러워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 중턱에서 본 풍경


 윈 힐에 도착해서 든 생각이 있는데, 지구의 초창기에 분명 이런 곳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정상 부근에는 구름이 많이 끼었는데, 구름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 햇빛이 땅을 쪼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멋진 자연경관이 많지만, 세상이 시작될 때 이랬을까 싶었던 곳은 아직까지 난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산이 너무 울창하고 푸르른 나무가 많아서 모든 것이 완성된 느낌을 준다. 한국과 다른 영국 피크 디스트릭트의 특징으로는 우리나라처럼 산 전체가 녹음이 우거져 있는 게 아니라 풀만 조금 자라 있는 곳도 많다. 돌만 튀어나와 있는 곳도 있어 날것의 매력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포장된 등산로도 없으니 더 자연에 가깝다. 그래서 피크 디스트릭트는 세상의 시작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미완성의 멋이 느껴지는 곳이다.


윈 힐의 정상에서


비록 재밌진 않더라도... 자연은 언제나 옳습니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자연이 다른 누군가에겐 특별할 것 없고, 재미도 없을 수 있다. 어렸을 적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의 나도 산에 가고 공원에 가는 이유가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등산을 하거나 하이킹을 하는 이유도 단순히 재밌자고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연을 경험할 때면 재미를 넘어선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피크 디스트릭트에서 느낀 자연이 좋은 이유는 자연 그 자체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도 있지만 속세를 잊게 해 주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피크 디스트릭트에서 보냈던 시간 동안은 평상시에 내가 하는 생각이던 대학교 수업, 세상 돌아가는 상황, 한국에 돌아가면 할 일, 나의 미래 등은 던져버리게 됐다.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자연의 중요성을 영국에 와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그 사실을 까먹고 살 뻔했는데 피크 디스트릭트가 깊은 임팩트를 주어 다시는 까먹지 못하게끔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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