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바시티
학생회관 안에 있는 학교 기념품 가게에서는 언젠가부터 온통 이 옷을 팔기 시작했다. Varsity라는 단어는 태어나서 본 적이 없는 영어 단어였다. 이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었는데, 며칠 뒤 저 옷을 길거리에서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나서는 저 단어 뜻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영어 사전에 Varsity가 무엇인지를 검색해 본 결과, 대학 대표팀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Varsity(바시티)는 대학 대표팀 간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는 말이다. 막연히 사전에 찾아봤을 때는 생소한 개념이라 생각했으나, Varsity는 우리나라에도 있긴 하다. 그 유명한 고려대와 연세대의 라이벌 매치도 바시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알고 보니 나는 바시티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있었다. 대학교에서 ‘과잠’이라 불리는 각 과별로 입는 야구잠바를 패션 용어로 ‘바시티 재킷’이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바시티 재킷’의 뜻 자체가 대학 대표팀 재킷이라니. 드디어 Varsity의 실마리가 풀렸다.
영국 최초의 바시티는 유서 깊은 명문 대학교인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간의 경기라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 지방별로 우후죽순 바시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시티는 주로 같은 도시나 같은 지역에 있는 대학교들끼리 펼치는 라이벌 매치이다. 하지만 다른 도시에 위치해 있는 대학들끼리 경기를 펼치는 경우도 있다. 바시티가 시작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도 다른 도시니 말이다. 꼭 같은 행정구역 상에 위치해야만 바시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오늘날의 바시티는 영국에서 바시티가 처음 시작됐던 잉글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 웨일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도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보게 된 바시티는 사우스요크셔(South Yorkshire) 주 셰필드에 있는 두 대학교인 셰필드대학교와 셰필드 할람 대학교 간 라이벌 경기인 셰필드 바시티이다. 1996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약 30년이 조금 안 됐으니, 나름 전통이 있는 대회이다. 앞서 언급한 고려대와 연세대 간의 라이벌전은 체육교육과 학생들이 펼치는 경기이며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럭비, 축구 총 5개 종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셰필드 바시티는 전공을 무관한 다양한 학생들이 나서서 참여하는 대회이다. 그들은 아마추어 선수로써 그저 자신이 원하는 스포츠 종목 경기에 참가하게 된다. 영국 대학교에는 무수히 많은 스포츠 동아리가 존재하므로 바시티 종목도 수도 없이 많다. 네트볼, 라크로스, 코프볼 등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종목도 바시티 안에 들어가 있다.
수많은 종목 중에서도 셰필드 바시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바로 아이스하키. 하도 재밌다고 하길래 안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수도 없이 많은 바시티 종목 중에 가장 마지막에 열리는 경기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이기 때문에 바시티 전체 결과도 이 자리에서 나와 우승팀을 발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바시티는 대학교 간의 대결이지만 시 전역에 퍼져있는 다양한 스포츠 시설에서 진행된다. 아이스하키는 시내에서 약 30분 떨어진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 진행된다고 해서 트램을 타고 가야 했다. 아이스하키 티켓 안에는 경기장까지의 트램 값도 포함되어 있는데, 지정된 트램 정류장인 ‘셰필드 대학교’ 앞에서 타야 한다고 했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부터 트램을 타려고 기다리는 긴 행렬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사람 많은 지하철을 수도 없이 타봤는데... 이렇게까지 내 몸이 눌리는 경험은 처음 해봤다. 트램은 한국 지하철보다 안이 훨씬 작고 좁은데,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한 번에 타니 몸이 심하게 짓눌렸다. 물론 인기가 많고 재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 인기인지는 전혀 몰랐다. 학생들이 사람이 가득 찬 트램에서 자신의 학교 응원가를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난 취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응원가는 못 부른다.)
이 날의 분위기는 흡사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 같았다. 영국에서 축구 경기 시작 전이나 끝나고 난 후의 시간대에 트램을 타면 딱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다들 자신이 응원하는 유니폼을 입고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찾는 축구 경기도 아니고, 학생들 간의 행사인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여러모로 놀랍기만 하다.
(이렇다 보니 개인적으로 영국에서 축구 경기 있는 날은 대중교통 안 타고 싶다... 시끄럽고 미어터질 것 같고 심지어 트램 안에서 담배도 피운다.)
경기가 시작할 때쯤 되어서는 경기장 전체가 가득 찼다. 라이벌전이라 그런가 격렬한 경기가 이어졌다. 경기 분위기가 잠시 과열 양상이 되었을 때는 양 팀 선수들끼리 몇 번 싸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양 팀을 응원하는 학생들도 이에 질세라 응원전을 하고 야유를 퍼붓기도 하고 그랬다. 경기장 스크린에 자신의 팀 선수가 단독으로 화면에 잡히면 엄청난 환호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경기는 1-2로 셰필드대학교가 끌려가던 중 경기 종료 3분을 앞두고 동점을 만들더니, 연장전 후 열린 승부차기에서 골키퍼의 선방쇼로 셰필드대학교가 극적인 승리를 차지했다. 폭우가 쏟아지고 성난 바람이 연신 몰아치던 이 날 경기장 밖과는 심하게 대조될 정도로 경기장 안의 분위기는 금세 용광로로 변해버렸다. 그 불길을 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학교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아마 이번에 갔던 바시티가 졸업 전에 마지막으로 참여한 학교 행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것도 영국 와서 새로운 경험 해보려고 가본 것이지 내가 매년 봐왔던 학교 행사였다면 고학년인 지금은 안 갔을 수도 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취업 준비 등으로 인해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학교 행사나 축제에서 즐길 시간적 여유는 없을 것이라는 걸 이미 나 스스로도 알고 있다. 진정한 대학 생활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느껴서 그런가, 아이스하키장에서는 지금까지 내 대학생활 전체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이스하키 선수들을 주목해 보니 전문 선수들은 아니기 때문에 패스나 움직임이 가끔 투박해도, 경기 중 몸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다 전력을 다해 뛰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스하키를 평상시에 보는 것도 아니고, 규칙도 잘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그냥 그런 마음이 느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내던지는 느낌이랄까. 퍽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닿지 않아도 최대한 멀리 손을 뻗어보고, 퍽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빙판을 내달렸다. 경기 종료 후 승리가 결정되고 나서는 보호장구를 벗어던지고 누구보다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소리도 질러가면서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그렇다고 진 팀의 선수라고 좌절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같은 편은 아니었어도, 하나의 경기장에서 땀을 흘린 사이의 승리를 존중해 주고, 자신들도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선수들을 보면서 부러웠던 것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학창 시절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불태워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전공에서 공부를 하다가 틈틈이 모여 얼마나 이 날의 경기를 위해 아이스하키 연습을 열심히 했을까 싶다. 그들은 아마 오늘 이 무대에 서기 위해 설레는 마음을 품고 웃으면서 훈련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나의 대학생활을 돌이켜 보니 나름 열심히 산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온 전력을 다해 불태워 본 적은 없던 것 같다. 좋아하는 건 많은데, 그걸 위해서 내 대부분의 시간과 정성을 쏟을 정도의 것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슴이 뛸 정도로 좋아하는 걸 찾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좋아하는 게 많다는 것도 어디인가. 하지만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의 나는 그저 학생 선수들이 행복해 보여서 그들이 잠시 부러웠다.
고등학교 때 지독하게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 선생님께서 이때가 제일 행복할 때라고 하셨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찼던 기억이 있다. 비록 아직 학생 신분이긴 하나, 사회로 나가기 아주 일보 직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대학교라는 울타리까지 나가면 지금과 같은 자유를 아마 없을 것이라는 걸 점점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남은 기간을 즐기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찾는 과정을 계속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아는가? 영국에서 봤던 아이스하키 선수들처럼 나도 가슴 뛸 정도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될지?
그게 과연 무엇일지 찾는 과정을 계속하며, 오늘도 난 영국에서 잘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