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서점 탐방
서점이라는 공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누구나 머릿속에 자신만의 우주를 품고 살아가는데, 그 우주에서 나온 산물이 바로 책이다. 책 한 권에는 작가의 유년 시절, 직업, 가치관, 이상향 등 그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서점은 그러한 책들이 수도 없이 모인 곳이니 우주만큼이나 넓고 무한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여행을 갈 때마다 하는 루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점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태어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사람들이 쓴 책에는 작가들이 나고 자란 다양한 환경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기 때문에 나라마다 서점은 큰 차이를 보인다. 국가별로 문화, 자연환경,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덕에 서점을 방문하면 그 나라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의 서점에는 문제집 코너에 책이 수두룩하다. 이를 보면 다른 나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한국만의 교육열을 느낄 수 있다. 국어, 영어, 수학뿐 아니라 취업을 위한 각종 자격증과 전문직 시험 문제집이 도처에 널려있다. 또 인상적인 것은 외국어 코너이다. 한국 서점에는 놀라운 양의 토익, 토플 책이 있다. 이는 한국인들이 영어 공부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처럼 서점은 각 나라에서 중요시하는 가치에 더해 그 나라에서 변해가는 트렌드도 여실히 보여준다. 2010년대 중 후반쯤에는 tvN의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 있을 때였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인문학 열풍이 불어서 서점에 교양 상식이나 역사 관련 책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코딩 열풍이 불 때는 파이선과 같은 각종 컴퓨터 언어들을 다룬 책이 쏟아져 나왔었다. 코로나19 이후 동학개미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경제 경영 코너의 주식 분야 책이 불티나게 팔렸고, 주식에 이은 다음 타자는 부동산 투자 책이었다.
이처럼 서점을 자세히 둘러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상이 보이고, 현재 사람들이 무엇에 미쳐있는지를 꽤 많이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직접 그 나라에 평생 산 사람들처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꽤나 가성비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 와서도 책 살 것이 꼭 없어도 자주 서점을 ‘스캔’한다. 그럴 때마다 한국과 큰 차이를 느껴서 굉장히 흥미롭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분야인데 불구하고 영국 서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반대로 한국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분야인데도 영국 서점에는 엄청나게 많은 코너를 할애하고 있는 분야도 있다. 영국의 서점을 둘러보며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분야 4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1. 역사
역사 코너에 가서 엄청난 양의 영국사 책을 보고 솔직히 많이 놀라웠다. 책을 내는 것이 자원봉사 차원에서 내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돈을 벌려고 내는 것 아닌가. 영국사 책이 이렇게나 많은 걸 보면서 이 정도의 독서층이 있으니까 이렇게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영국이란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역사적 사건이 훨씬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세계 초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 자연스레 사건 사고가 많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놀라울 정도의 양이라서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정말 관심이 많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자신들의 역사인 영국사만 관심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European History(유럽 역사)라고 해서 유럽사 코너도 크게 따로 마련되어 있다. 자신들의 역사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기에 여러 나라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 보였는데, 이 부분이 긍정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유럽은 워낙 많은 국가들이 있어서 전쟁이 워낙 잦았다 보니 Military History(군사 역사) 코너도 따로 있다. 특히 제1,2차 세계대전 관련 책이 많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인 데다가 영국이 직접 참여도 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직도 세계 대전을 겪은 세대가 살아있고, 그 영향이 지금도 끝나지 않았기에 이를 잊지 않고 교훈을 잘 새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2. 왕실
왕실이야말로 우리나라 서점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소재이다. 우리나라는 애초에 왕실이 없기 때문이다. 왕실이 있는 나라는 꽤 있지만, 왕실을 말하면 영국을 떠올릴 정도로 영국 왕실은 이미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왕실 자체가 하나의 문화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이 흥미로웠다. 영국에는 총리가 실질적인 국정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왕실이 크게 하는 일은 없어 보이지만, 왕실이 소프트 파워로써 영국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은 왕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근에 다시 왕실을 향한 관심이 대폭 늘어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전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책, 그리고 새롭게 왕위에 오른 찰스 3세 왕에 대한 책이 진열대에 많이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국 왕실과 관련돼서 가장 많이 마주한 책은 해리 왕자의 자서전인 'Spare(스페어)'이다. 올해 출간 하루 만에 143만 부가 팔렸으며, 아직도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책은 전면에 해리 왕자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와 있는데, 영국 어느 지역의 서점을 가도 입구부터 바로 해리 왕자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책 속에는 영국 왕실의 현실을 폭로했다고 해서 인기와 동시에 큰 논란을 낳기도 했다. 영국인들이 얼마나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스포츠
우리나라 서점에서 스포츠 서적은 사람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 어딘가에 아주 조금 포진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스포츠가 영국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고, 삶 깊숙이 들어와 있기에 스포츠 서적이 말도 안 되게 많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면 영국 서점은 거의 천국이 아닐까 싶다. 꼭 리오넬 메시 정도의 세계적인 선수가 아니어도 적당히 이름 날렸으면 거의 다 자서전을 낸 것 같다.
물론 축구 관련 서적이 압도적인 양을 자랑한다. 영국은 축구의 종주국이며 그들의 축구 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세계적인 인기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럭비와 크리켓 책도 역시 많다. 추가적으로는 최근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여자 축구와 더불어 복싱, 골프, 테니스, F1 등 다양한 스포츠를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 비해 훨씬 다양한 종류의 스포츠를 볼 수 있어 영국인들의 스포츠를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4. 여행
이건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들도 해당되는 것 같은데, 휴가에 진심인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도 서점에 가면 여행 서적이 즐비하다. 스포츠에 이어 여행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영국 서점에 오면 구경할 것이 너무나 많을 것이다. 4월 초부터 내가 다니는 학교는 부활절 방학 기간을 맞이했다. 3주 간 학교를 가지 않기 때문에 학교 근처가 정말 황량하다. 다들 어딘가로 휴가를 간 것이 분명하다.
영국 땅은 한국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국내 여행 책은 당연히 우리나라보다 많다. 그리고 유럽 여행 책도 어마무시하게 많다. 특히 남유럽 나라들 책이 많았다. 이건 아마 영국 날씨가 심하게 좋지 않기 때문인 것 같은데, 영국과 비슷하게 흐리고 춥고 비가 많이 오는 곳보다는 하늘이 예쁘고 따뜻한 곳을 다들 가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유럽 말고 다른 대륙을 다룬 책도 많다.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심지어 아프리카 책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가 많이 멀지만, 유럽에서 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것도 있고,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 지배를 했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 있는 영연방 국가들을 방문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편안해서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여담으로 아쉽게도 한국 여행 책은 거의 없다.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의 서점을 가봐도 일본 여행 책은 없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양도 많았다.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가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인지도가 아직은 그렇게 많지 않고, 유럽에서 한국은 매우 먼 데다가 그 정도의 시간과 비용을 감수해서 올 만한 매력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거리를 걸으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관광객은 많이 봤어도 유럽인들은 거의 보지 못했던 걸 생각해 보면 그런가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 왕실, 스포츠, 여행 서적은 한국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에 인상 깊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 대형 서점에서 넓은 칸을 배정받은 경제, 경영 코너와 교육 코너(문제집, 외국어 등)는 잘 보지 못했다. 특히 문제집은 아예 보지 못했고, 외국어 코너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책들만 아주 소수 보였다. 이는 영국 사람들의 모국어가 영어인데다가 영어는 거의 만국 공통어이니 제2외국어 또한 배울 필요성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그런 것 같다.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경제, 경영 코너가 작았다는 것이다. 경제학 하면 영국을 빼놓을 수 없는데 말이다. 한국은 그런 책이 지나치게 많은 감도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돈에 매몰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경제, 경영 책이 별로 없는 걸로 봐서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보다는 다른 곳에 가치를 더 두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모든 영국인들과 대화를 할 수도 없고, 평생 영국에 눌러앉아 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영국이란 나라를 완벽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국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는 서점을 갈 때마다 영국의 모습이 왜 그런지를 하나하나씩 깨닫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한국의 서점을 회상해 보니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우리나라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됐다.
*같은 영국 체인 서점이어도 약간씩 섹션 구성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느낀 점을 적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