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인종차별
영국 정부가 발표한 202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총인구는 5690만 명이다. 그중에서 백인은 81.7%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20%가 조금 안 되는 사람들은 백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약 1/5이나 백인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 역시 영국 사회에서 중요한 일원이라는 이야기이다. 백인 다음으로는 9.3%의 아시아인과 4.0%의 흑인을 주목해 볼 만하다.
백인 외 인구비율을 나타낸 이 표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아시아인들 중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영국의 과거 식민지배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영국에서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음식점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은 원체 인구 수도 많고, 자국이 아닌 곳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영국에서 역시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거주 중인데 길거리에서나 학교 건물에서 무수히 많은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흑인도 많은데, 자세하게 나누면 2.5%의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과 1.0%의 카리브해 지역 출신 흑인들로 나눌 수 있다.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도 영국이 지배했던 나라들이 많기 때문에 독립을 했어도 영향을 받아 영국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영국에서는 백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이 한데 섞여 살면서 세계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다양한 나라 중 한 곳이 됐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다문화 사회에서조차도 아직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를 향한 인종차별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영국인들은 손흥민 선수를 향해 개고기나 먹으라는 등의 악플을 달기도 하고, 축구장에서 그를 향해 눈을 길게 찢는 제스처를 취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영국 방송사의 한 축구 해설가가 손흥민 선수의 반칙 장면을 두고 Martial Arts(무술)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일면서 방송사에서 경고를 받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솔직히 인종차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한국은 다른 유럽 나라들과 다르게 인종 구성이 다양하지 않고, 나 스스로가 한국의 인종 구성 중 절대 다수인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에 오고 나서 피부로 느껴 보니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게 되었다.
“니하오!”
...
“니하오!”
...
“니하오가 너네 말로 ‘안녕’이라는 뜻 아니야?”
“지금 내가 너한테 인사하고 있잖아...??”
“아니 XXX 왜 내 인사 안 받아줘?”
“내가 너한테 지금 인사하잖아!! XXX”
...
학교를 가려고 기숙사를 나오자마자 길거리에 있는 한 영국인 아저씨가 "니하오!"라고 소리쳤다. 속으로 조금 놀랐는데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겠지 싶어 조용히 가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좋은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나한테 하는 말이 맞았다. 그 순간 예전에 손흥민 선수가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는 무대응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괜히 화내거나 하면 일이 커질 수도 있고, 내 기분만 망치는 일이니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나에게 계속해서 소리를 치고 욕을 퍼부었다.
영국에 도착한 이후로 유럽의 다른 나라를 갔던 것을 포함해 총 5번의 인종차별을 당했다. 식당을 갔을 때 많은 빈자리를 놔두고 나를 포함한 외국인들만 문 앞자리에 앉으라고 한 웨이터도 봤고, 현장체험 학습 나온 어린이들에게 "니하오" 세례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니하오"라고 외치고 자기들끼리 키득키득거리고 지나가기도 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겪은 인종차별에 비하면 정도가 약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화가 많은 성격은 아니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당하고 나니 언짢은 감정은 꽤 지속되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억울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왜 생긴 것만 가지고 이렇게 사람들을 차별하고 막 대하느냐라는 것이다. 인종은 누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태어나는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인종 간 우열 같은 것도 없는 건데. 아마 식민지배가 판치던 제국주의 시기의 영향이 클 것 같은데, 그때 유럽 백인들이 다른 인종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으로 통탄할 따름이다.
수업 시간에 영국인들이 같은 백인 영국인들을 대하는 것이랑 나를 대하는 것이 다르다고 느낄 때가 가끔 있었다. 나를 향해 벽을 세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저 사람과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이해가 갔다. 사람은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기고, 자라온 곳이 같고,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할 것이다. 나는 피부가 흰색이 아니며, 영국이 아닌 한국 출신이고, 이 나라를 그들처럼 잘 아는 것이 아니니까 통하는 것도 적을 것이다. 이건 한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비슷하게 해당될 것 같은데, 자신과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가까움을 느끼지 않나.
만약 혹시나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과 겉모습은 물론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에게 거리감을 느낀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이유로 대놓고 안 좋은 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심지어 때리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냥 속으로 나랑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랑 그걸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인종차별은 뿌리가 꽤 깊게 박힌 것 같은데, 이걸 완전히 해결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인종차별을 당해본 것이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혹시 나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전에 하진 않았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잘한 일이 절대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인종차별이 있다. 아니, 많을 것이다. 한국으로 이주해 온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향한 차별은 뉴스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런 일들도 동남아시아 사람들보다 한국인이 더 낫다는 사고방식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해외에 와서 그 나라 사람들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이방인이 되어보고, 또 인종차별을 당해보니 인종차별 뉴스를 접하면 더 감정이입이 되고 가슴이 아프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경은 희미해졌고 세계는 점점 더 많이 섞이게 됐다. 그래서 다양한 인종이 한데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세계가 되었다. 다양한 인종, 국적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웃으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올까? 최소한 내가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해외에서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은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는 세상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