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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스 Apr 26. 2023

공포의 세미나

영국 대학교에서 '겨우' 살아남기

“네가 Keir Stamer(키어 스타머, 현 영국 노동당 대표)라면 지금 인플레이션 어떻게 해결할래?”

“Jeremy Corbyn(제레미 코빈, 전 영국 노동당 대표)의 유산은 뭘까?”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가 말한 사회계약은 어떻게 다르지?”

“존 스튜어트 밀은 마약 하는 걸 보고 뭐라고 했을까?”

한 번 생각해 보고 옆 자리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해 보세요.



음..... 그러게요.....?



 차마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이 나에게 계속 날아오는 곳, 바로 영국의 세미나 수업이다. 내가 영국에 와서 듣는 수업들은 한국처럼 한 과목을 일주일에 두 번 수업한다는 것은 같다. 하지만 수업 방식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두 번 다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를 듣는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한 번은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머지 한 번은 강의를 토대로 한 세미나를 진행한다. 세미나는 ‘소규모 토론 수업’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한 세미나 수업에서는 무려 2시간 동안 토론을 한다


 세미나는 소규모로 하기 때문에 분반으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보통은 수강생을 3~5개의 분반으로 나누는 것 같다. 그래서 한 분반에는 10~20명 정도의 학생들이 들어간다. 강의는 엄청 큰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반면, 세미나는 적은 수의 인원만 필요하기 때문에 조그만 칠판과 테이블 몇 개가 전부다. 그리고 세미나에서는 학생들이 전부 붙어 앉는다. 떨어져 있는 학생의 경우 교수가 자리 이동을 부탁한다.


 강의는 한 교수가 하지만, 세미나 분반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 교수가 세미나를 전부 진행할 수 없다. 그래서 수업을 하지 않는 다른 교수가 들어와 세미나를 진행한다. 세미나 교수의 역할은 한국의 교수와 많이 달라서 특이했다. 세미나 교수는 토크쇼 예능의 MC 역할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미 강의에서 수업을 했기 때문에 세미나 교수는 추가로 지식 전달을 하기보다는 내용 정리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양의 질문을 던진다.


 세미나 교수가 수업 시간에 보이는 태도 역시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라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강의실 한가운데에 의자 하나 놓고 다리 꼬면서 삐딱하게 앉아있기도 하고, 말하면서 교실을 계속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모든 의견을 경청한다. 심지어 세미나 중간에 학생들 간 토론이 격해서 서로 싸울 뻔한 적도 있었는데 중재하려 하지도 않고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경청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 말이 끝나면 그 혼란을 깔끔히 중재하고, 모든 의견에 대해 자신의 피드백을 말해준다. 학생의 의견이 훌륭했다거나, 아니면 살짝 잘못짚은 것 같다거나. 그렇다고 권위적이지도 않은 것이 학생이 잘못 말했을 경우에는 "내가 아는 바로는 아마 ~이지 않을까 싶어"라는 식으로 에둘러서 말한다. 


 가장 위에 쓴 4개의 질문은 수업 시간에 세미나 교수에게 직접 들었던 질문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당혹스러웠다. 영국 정치인들은 누군지 모르고, 누군지 모르는데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알겠나. 그리고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번에 답하기 힘든 질문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어로도 저런 질문은 쉽게 답하지 못할 것 같다. 제발 쉬운 질문을 물어봐주길 바라는데 쉬운 질문은 어차피 알거라 생각하는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야속하게도 물어보지 않는다.


세미나의 모습


  한국에서는 애초에 수업 중에 교수가 질문을 거의 하지 않을뿐더러, 하더라도 보통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니까 교수가 넘어가거나 답을 말해주거나 하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런 거 없다. 일단 말을 하게 만드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하라고 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나한테 어떻게 생각하냐고 먼저 물어오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고 “저 영국 정치인들은 잘 몰라서 모르겠어요”라던가 “교수님이 내준 논문 안 읽어봐서 모르겠네요”라고 절대 말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하면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모른다는 이유의 핑계는 대고 싶지 않다. 교수가 됐든, 옆에 앉은 이가 됐든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못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일만은 너무나도 피하고 싶으니까.


 어떠한 질문이 나올지 몰라 세미나를 가는 길은 아직도 많이 두렵다. 그리고 수업 시간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세미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의 복습도 하고, 세미나 전에 읽으라고 내준 논문도 읽는다. 물론 이렇게 하더라도 교환학생 한 학기 만에 영국인들을 완벽히 따라잡을 순 없다. 난 일단 영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잘 몰라서 관련 질문이 들어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렵다. 그들보다 영어도 못 해서 수업이든 논문이든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말하고 싶은 게 있어도 내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세미나 준비를 조금이라도 해서 가면,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게 됐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는 세미나 시간마다 공개 처형을 당해 앞으로 그것만은 면하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세미나 준비도 하고 있고 적응도 조금 돼서 수업 시간 후에 살아서 나올 수 있게 됐다.




 이렇듯 세미나는 나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존재이지만 장점이 많고 매우 유익한 교육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국은 대부분 교수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 그걸 암기해서 시험을 보도록 한다. 하지만 영국은 절대 그렇지 않다. 수업 때 A라는 사실에 대해 배웠으면 왜 그런 결과가 일어났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현대 사회에는 적용할 수 있는지,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지 등등 MC 역할의 세미나 교수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로써 배웠던 것을 끊임없이 떠올리면서 수업 때 배웠던 내용을 잘 까먹지 않게 되고, 다양한 종류의 질문을 받기 때문에 배운 내용과 관련해서 나의 생각도 훨씬 풍부해지게 된다.


 한국 수업에서는 강의 한 번 듣고 나면 지식이 머릿속에서 금방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준비할 때 필기했던 것이나 수업 PPT를 보면 과연 이런 걸 배웠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는 강의를 복습하며 세미나를 준비하고, 논문을 읽어보고, 세미나 수업 역시 복습을 한다. 그래서 수업 내용을 한국보다 훨씬 여러 번, 그것도 다양한 방법으로 접하면서 더욱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는 수업에 가서 매시간 진이 완전히 빠져서 너덜너덜해진 채로 하교했다. 머리로는 생각하기 바쁘면서 수업 2시간 동안 한 마디도 못 하고 돌아가면 어려운 수업 내용과 벅찬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 그리고 나는 이들보다 한참 부족하다는 자책이 나를 지배했다. 그러나 익숙해지다 보니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고, 이제는 세미나의 장점도 보이게 됐다. 세상에 완벽하다는 것은 없기에 세미나도 100% 완벽한 교육 방식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영국에 와서 보니 암기식 교육이 아직도 판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커서 한국에서도 많은 대학 수업에서 이를 시행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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