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London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내셔널 갤러리를 등진 채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애드미럴티 아치라는 큰 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버킹엄 궁전까지 직선으로 연결된 길고 긴 도로인 ‘더 몰’이 나온다. 산들산들 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오후 7시 30분.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걷는 그 길에서 1월의 런던이 떠올랐다.
1월,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린 건 오후 5시 30분쯤이었던 것 같다. 9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는 6월의 영국과는 달리 그때는 한겨울이라 밖을 보니 어둑어둑했고, 짐을 찾아서 나오니 해가 완전히 져서 캄캄했다. 입국장으로 가는 길, 영국인들이 웃는 사진과 함께 Welcome이라고 쓰여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걸 보면서 내 기분은 전혀 좋지 않았다. 외국에 왔다는 신남보다는 초긴장 상태였다. 마음속으로는 정신줄을 꽉 잡으며 100% 전투 모드로 임했다. 일단 아무 일 없이 내가 생활하게 될 셰필드까지 또 먼 길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캄캄한 첫인상과 더불어 런던 지하철의 매캐한 공기, 지하철 역 밖으로 나왔을 때의 차디찬 바람을 잊지 못한다. 바람이 너무 차서 앞으로 내가 보내게 될 시간은 이렇게 참혹하려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굳게 다잡아보려 속으로 채찍질도 단단히 하고 괜찮다 괜찮다 되뇌었지만, 솔직히 그날 런던에 도착했던 날의 기억은 좋지 못했다.
그랬던 나는 6월의 런던 속에서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다. 매 순간이 꿈만 같다. 뉴욕, 파리, 런던은 많은 이들이 환상을 가진 도시인데, 왜 수많은 이들이 환상을 가지는 도시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만약 런던에 살았다면 안 좋은 점도 많이 알게 됐겠지만, 잠깐 온 내 입장에서 런던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첫인상은 좋지 않은 곳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아가다 보니 런던은 아주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런더너처럼 브런치를 먹어보았다. 사워도우 빵 위에 아보카도, 연어, 그리고 수란 2개. 칼로 수란을 싹 베면 노른자가 천천히 흘러나오며 연어를 적신다. 아보카도와 사워도우 빵까지 한 입에 넣으면 부드러운 맛이 입안 여기저기서 춤춘다. 이 모든 맛의 향연 뒤에는 적당한 산미가 있는 플랫 화이트. 커피가 입 안을 감싸고 돌 때쯤에 내 미각은 완전히 리셋.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 된다. 이것이야 말로 소확행이 아닐까?
바깥의 풍경도 심히 이질적이었다. 브런치를 먹은 카페는 서머셋 하우스라는 곳 안에 있었다. 서머셋 하우스는 코톨드 갤러리를 포함해 다양한 예술 전시와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이라고 한다. 버킹엄 궁전처럼 거대한 돌기둥이 있는 이 웅장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나는 안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마침 유리창이 열려있어 바깥 경치를 볼 수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이때 봤던 모습이야 말로 한국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어느 날 오전 런던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구름은 정오를 지나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을 때면 그 도시의 랜드마크 한 번쯤은 꼭 봐줘야 한다. 런던의 상징이라 하면 단연 타워 브리지와 빅벤! 마침 빅벤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맑은 날의 모습은 어떠할까 너무 궁금해졌다. 사실 전날 저녁에 빅벤을 봤는데, 그 당시에는 하늘이 흐렸다. 맑은 하늘이 뒤에 걸린 빅벤의 풍경은 그림과도 같지 않을까 상상하며 한걸음에 달려갔다.
웨스트민스터역에 도착하니 빅벤의 가장 핵심인 시계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빅벤이 한눈에 보이는 곳까지 도착해서 빅벤의 전체를 제대로 보고 싶었기 때문에 거의 땅만 보고 빠르게 길을 걸었다. 빅벤을 보고 싶으면 빅벤으로 가면 안 된다. 타워 브리지의 풍경을 보고 싶으면 타워 브리지를 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조망해야 하듯이, 나도 빅벤을 한눈에 담기 위해 빅벤과 강의 반대편을 연결한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끝까지 건넜다.
다리 끝에 서서 뒤를 돌았다... 정말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다. 21세기도 아닌 그 옛날에 이렇게나 크고 정교한 건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심히 놀라웠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곳들이 엄청난 디테일을 자랑한다. 나는 이런 건물 레고로 만들라고 해도 절대 못 만든다. 그만큼 대단하게 느껴졌다. 감탄에 감탄을 연신 토해내던 중, 정오가 되어 시계탑에서 종이 쳤다. 그 순간 역시 내가 여기에 서있는 게 꿈은 아닐까 싶었다. 런던 한복판, 한계가 없는 드넓은 하늘 아래 있으니 매우 상투적이지만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는 땅바닥이 더럽다는 이유로 바닥에 앉거나 누워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영국 사람들은 그런 거 상관없이 어디서든 앉거나 눕는다. 그런 광경이 참 여유로워 보였지만, 나는 공원에 가면 어찌 된 일인지 항상 벤치에 앉게 됐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시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순간, 그들처럼 여유를 즐겨보기 위해 런던 하이드 파크의 아무 잔디밭에 가서 앉았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바닥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바닥에 앉거나 누워볼 일은 더더욱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도 있다.
잔디밭에 앉아서는 핸드폰도 쳐다보지 않고, 노래도 듣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내 앞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봤다. 마음속 찌든 때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푸르른 하늘은 과연 내가 본 적이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 날 하이드 파크에서의 하늘이 좋았다. 게다가 그 후로는 한참을 누워만 있었다. 누워 있다가 눈을 떴을 때 시간이 꽤 지나 있던 걸 보니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밖에서 누워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살랑살랑 나부끼는 나뭇잎들이 예뻐 보였다.
나는 영국에 올 때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들어왔는데, 나가는 것도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나간다. 런던은 내 영국 생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곳이다. 영국에서의 시간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 슬슬 인생의 다음 스텝을 그려보게 된다. 심히 암울했던 1월의 런던을 지나 내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눈부시게 밝은 런던을 만났다. 우리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닐까? 모든지 처음은 생소하고 걱정뿐이어도 빛을 만나는 때가 분명 온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