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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스 May 31. 2023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in Sheffield

#1

 영국에 처음 왔을 때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뛰어다니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정말 말 그대로 뛰는 사람이 많다. 운동을 위해. 한국에서는 뛰는 사람들을 솔직히 많이 보진 못했다. 뭐 간혹 한강에서 뛰는 사람들을 본 적 있긴 하지만. 그런데 영국에서는 아무 데서나 막 뛰어다닌다. 공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 여기저기를 막 뛰어다닌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뛰어다니는 걸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 러너들을 봤을 때는 저게 뭐가 재밌나 싶었다. 개인적으로 팀 스포츠를 좋아한다. 상대 팀을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 때문에 동기부여가 돼서 몰입하기도 하고,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덜 심심하다고 느낀다. 한국에서도 몇 년 사이에 유행한 러닝 크루처럼 여럿이서 같이 뛸 수 있지만, 러닝이라는 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혼자 막 뛰는 사람들을 보면서 되게 심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러닝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저렇게까지 많이들 뛰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영국에 와서도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한 번 마음먹고 뛰어보기로 했다. 걸려있는 게 있다면 운동하는 걸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순간이 와도 쉽게 관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기롭게 목표도 정했다. 한국 들어간 후 가을이 되면, 10km 마라톤 완주하기!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2월. 플리스까지 잔뜩 껴입고 학교 앞 공원에 나갔다. 뛰면서 노래 듣는 사람들이 많길래 나도 저렇게 해봐야겠다 싶어 헤드셋까지 장착하고 나갔다. 결과는? 10분 만에 방전. 아마 1km를 살짝 넘게 뛴 것 같다. 벅찬 숨을 몰아쉬며 벤치에 앉아 망연자실했다. 지나가는 영국인들 아무나 봐도 엄청 잘만 뛰어다니는데. 고작 노래 3곡 들으니까 지쳐 쓰려졌다. 목표로 했던 10km가 비현실적인 숫자로 다가왔다.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이틀에 한 번 공원에 가서 뛰고 또 뛰었다. 점차 적응이 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시간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뛸 때 나를 반기는 선선한 바람, 마음이 편해지는 호수, 신나는 음악, 공원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푸르른 나무와 잔디밭, 그리고 어느덧 봄이 왔음을 알리는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꽃들까지. 공원을 걷거나 벤치에 앉아서도 즐길 수 있는 것들이지만, 뛸 때 보는 것은 괜히 느낌이 다르다. 똑같은 풍경을 자전거를 타고 볼 때, 차 안에서 볼 때 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속도가 다 다르니까 똑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틀에 한 번 달리기를 하는 Crooks Valley Park


 어느덧 5km를 뛸 수 있게 됐다. 5km를 뜀에도 불구하고 러닝을 했던 첫날보다 덜 힘들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10분 뛰고 헉헉대던 내가 40분을 넘게 한 번도 안 쉬고 뛸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이제는 내 몸이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에 10km도 불가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수많은 영국인들이 없었다면, 공원에서 뛰어야겠다는 생각은 못 해봤을 것이다. 나의 삶에 사소한 변화를 가져다준 영국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2

 영국에 오고 나서 여행을 다니고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많이 놀러 다녔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나에게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공부이다. 소중한 돈과 시간을 들여 영국에 온만큼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러모로 발전하고 싶었다. 여행을 다니고 논다고 발전을 안 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영국 대학교에 오면 한국의 대학교에서는 절대 접할 수 없는 것들을 배우기 때문에 지식적인 측면에서도 발전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일단 교육에 대한 접근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한국에서 매번 보던 중간고사, 기말고사 대신 영국에 와서는 중간고사 때 3개, 기말고사 때 3개를 합쳐 총 6개의 학술적인 글을 써서 제출했다. 시험을 보지 않는다는 건 암기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속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시험기간을 며칠 남겨두고 조용한 학교 독서실에 앉아 부리나케 뭔가를 외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건 절대 아니다. 가장 길게 써야 했던 글은 영어로 2,500 단어를 적어서 내야 했는데, 아는 게 없다면 그만큼 쓸 말이 없다.


 챗GPT로 대학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미친 듯이 편하겠지. 내가 원하는 형식대로 부탁하면 전부 다 들어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는 생각이란 걸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얻어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외국에서 잠시라도 유학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데, 훗날 남는 게 없었다고 후회하기 싫었다.


 그래서 내가 마주한 새로운 교육방식을 두고 최선을 다했다. 수업 예습, 복습은 물론이고 수업 내용과 관련된 논문도 찾아 읽어봤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관련 영상들도 봐주고, 영어 원서도 매일매일 꾸준히 읽었다. 이렇듯 교환학생을 왔다고 해서 놀기만 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보 습득에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영국에 있다 보니 모든 것을 영국의 예로 설명을 한다. 이건 전공의 차이도 클 테지만, 내가 들었던 수업들에서는 영국 정치와 영국 역사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처음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맥락이 이해가 가지 않아 따로 다 찾아봐야 했다. 지식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것을 많이 알아간 학기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점에 가면 영어 원서를 읽는다


 결론적으로, 이런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어 나의 영어 실력은 전보다 훨씬 늘었다. 혼자 있을 때조차도 영어를 놓지 않으려 많이 읽고 들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도 외국인 학생들과 토론을 하며 말하기 실력도 향상되었음을 느낀다. 또한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영국 수업을 경험해 보며 나의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하는 법도 터득하게 됐다. 전에는 수업 시간에 다른 친구들 앞에서 내 의견을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 어차피 매번 말 안 할 거니까 생각을 굳이 안 하게 됐는데, 그래서 그런가 내 뇌가 굳어버려서 어려운 질문은 답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영국에 온 뒤 강제적으로 말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서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도 꽤나 자연스러워졌다.


#3

 난 먹을 것에 참 진심이다. 그게 나에게는 꽤 거대한 행복이다. 쇼핑을 한다거나 여행을 한다거나... 다 좋지만 음식이 빠질 순 없다.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 참 단순하다고 느끼는 것이 맛있는 음식만 먹으면 기분이 금방 좋아진다. 인생... 먹으려고 사는 거 아니겠는가?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중이다.


 시험 기간에 내내 도서관만 가다 보면 처질 때가 있다. 기숙사에서 맛있는 걸 해 먹더라도 괜히 성에 안 찰 때가 있다. 내가 요리한 것보다 더 맛있는 바깥 음식이 먹고 싶을 때! 그럴 때는 간간히 나가서 외식을 한다. 영국의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많은 외식을 하지는 못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봤을 때 외식을 많이 했다면 한 학기는 고사하고 2~3달 버티다가 탕진해 버렸을 것이다. 나는 식탐이 많기 때문에 사실 충분히 그럴 위험도 있었다.


 오히려 가끔씩 외식을 해서 그런가. 한 번 밖에서 먹을 때 희열이 더 크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점심마다 하던 게 외식이었는데. 그때는 통학을 했기 때문에 수업과 수업 사이 점심시간에 집을 가서 밥을 먹고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씩 찾아오는 엄청난 희열이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Tamper Sellers Wheel - Big Kiwi


 셰필드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브런치 집이란다. 뉴질랜드 스타일이라는데 솔직히 영국 음식과 뭐가 다른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내가 뉴질랜드를 안 가봐서 잘 모르는 것일 테지만, 영연방 음식들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튼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아니다, 빅 키위라는 걸 먹었다. 뉴질랜드 음식점이라고 이름에 키위가 들어가나 보다. 영국에서 그동안 먹었던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중에서 가히 최고였다. 간혹 기름지게 조리한 곳들이 있는데, 여기는 담백하니 딱 좋았다. 한국에서는 이런 음식 먹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다양한 걸 먹을 수 있게 됐다. 입맛도 변할 수 있구나 싶어 웃기다.


 맛있는 밥 말고도 나를 웃게 만드는 것이 또 있으니, 바로 당이다. 적당히만 먹으면 사람에게 꽤나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기분을 확 좋아지게 만들고 두뇌 회전을 시켜주기 때문이다. 하도 노트북을 보고 있어서 머리가 핑핑 돌 것 같을 때, 달달한 간식을 먹으면 날아갈 듯하다. 영국에 그런 존재들이 많다. 브라우니, 플랩잭, 숏브레드 등. 


 시내에 카페에 가서 홍차와 바나나 브레드를 시켰다. 영국에 오고 나서 홍차는 이제 완벽히 맛 들려버렸다. 입 안에 감도는 은은한 씁쓸함이 참 좋다. 커피를 마실 때의 쓴맛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느낀다. 하지만, 쓴맛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단 맛도 먹고살아야지. 바나나 브레드가 빈자리를 완벽히 채워준다. 하지만 바나나 브레드는 은은한 단맛을 지니고 있었다. 엄청 달았으면 홍차의 맛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좋다.


Marmadukes - 홍차와 바나나 브레드




 셰필드에서는 그저 텔레비전을 달고 살았던 한국에서의 일상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봤다. 처음에는 달리기를 하는 것도, 영어로 된 책과 뉴스를 읽는 것도, 한식이 아닌 걸 먹는 것도 전부 생소했다. 시간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어느덧 내 라이프스타일도 한국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한국에 돌아가면 분명 영국에서의 삶에서 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분명 다시 왕창 한식을 먹으러 다닐 것이고, 다시 무한도전 보면서 깔깔거릴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다고 지금 영국에서의 일상이 의미가 없느냐? 전혀 아니다. 분명히 다른 일상을 살아보며 많이 발전했다고 느낀다. 그리고, 지금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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