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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스 May 24. 2023

영국에는 타임머신이 있다는데요

Back to 1962

 믿기지 않겠지만, 영국의 리버풀이 돈을 쓸어 담던 시기도 있었다. 세계 유명 축구팀 ‘리버풀 FC’의 연고지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그 리버풀, 맞다. 19세기 리버풀은 뉴욕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 북서쪽에 위치한 리버풀은 대서양과 접하고 있어 무역을 하기 최적의 입지 조건을 자랑한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세계 각지에 영토를 거느리고 있을 당시 대서양에서는 삼각 무역이 성행했기 때문에 리버풀은 모든 거래의 출발지와 도착지로 큰 각광을 받았다. 게다가 인근에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대도시인 맨체스터와 셰필드가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 전체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항구 도시였다. 19세기에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리버풀이 잘 나가는 곳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나 찬란한 과거를 가진 리버풀이 20세기 중반에는 영국 전체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한 곳이 됐다. 전 세계 바다라면 어디든 휘젓고 다니던 영국은 더 이상 없고, 기술 발전과 더불어 산업 구조가 바뀌며 영국의 제조업은 끝을 모르고 침체의 길을 걸었다. 제조업이 쇠퇴하며 점차 리버풀을 오가는 물자가 없어지자 항구는 쓸모가 없어졌고, 도시에 실업자는 늘어갔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가 황폐화되어 악명 높은 치안까지 자랑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21세기를 맞은 리버풀은 완전히 환골탈태했다. 도시재생 사업이 성공을 거두며 역동적인 도시로 재탄생했다. 과거 거대한 무역선들만이 오가던 부두 건물이 이제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공간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앨버트 독이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이 항만 시설 안에는 각종 레스토랑, 카페, 상점이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앨버트 독으로 향하는 더 큰 이유도 있다. 바로 이곳에는 비틀스 박물관인 '비틀스 스토리', 그리고 유명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의 리버풀 분점인 '테이트 리버풀'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깥 데크에는 시민들이 햇빛을 쬐며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고, 젊은 청년들은 노래를 틀어놓고 신나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다.


리버풀의 대표 관광지인 앨버트 독


 수변공간의 변화에 이어 슬럼화된 도심에도 변화의 물결이 찾아왔다. 리버풀 시는 시내 대부분을 뜯어고치며 리버풀 원(Liverpool One)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야외 스트리트형 쇼핑몰을 지었다. 리버풀 원은 점점 규모를 확장해 지금은 시내 중심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가게들과 사람들이 있는 이곳은 리버풀이 완전히 살아났음을 보여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변화한 리버풀은 유럽연합(EU) 선정 2008년 ‘유럽 문화 수도’로 뽑혔으며, 얼마 전 열린 유럽 최대의 음악 경연 대회인 ‘유로비전 2023’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희망적인 도시가 바로 리버풀이다.


리버풀 도시재생의 핵심인 야외 스트리트형 쇼핑몰 '리버풀 원'


 가난한 항구 도시 이미지를 벗어나 새롭게 태어난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도시를 거의 갈아엎었기 때문에 과거의 몇몇 상징적인 건물들을 제외하면 과거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옛날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안이 전부 바뀌었다. 하지만 딱 한 군데는 바뀌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잠시 1962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


 5파운드(약 8,000원)의 입장료만 있으면 타임머신을 탈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리버풀의 상징, 캐번 클럽이다. 이곳은 1957년에 만들어진 공연장으로, 비틀스가 데뷔 후 초창기에 292번의 공연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비록 비틀스가 일약 월드 스타가 된 후에는 주로 런던에서 활동을 했지만, 리버풀의 소년 4명이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장소가 바로 이 캐번 클럽이다.


 캐번 클럽에 가면 뮤지션들의 라이브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물론 당연히 비틀스는 아니다. 대신 뮤지션들이 비틀스의 노래들을 불러준다. 유튜브에 검색해 보면 비틀스가 캐번 클럽에서 1962년에 했던 라이브 공연 영상이 있다. 그 당시 입었던 검정 조끼에 검정 넥타이 복장을 뮤지션들이 그대로 따라 입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비틀스 멤버들이 남아 있었다면 백발이더라도 이렇게 옛날 옷을 똑같이 입고 이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틀스의 노래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나이, 국적, 인종을 초월해 모든 사람들이 흥에 겨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한 밴드가 비틀스 의상을 똑같이 입고 공연 중이다


 내가 살아본 적도 없는 1962년, 아마 이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똑같이 동굴처럼 생긴 실내에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고 벽에는 온갖 낙서로 도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때도 동굴 모양의 실내 덕분에 노랫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을 것이다. 라이브 공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력한 일렉기타의 소리가 심장을 후벼 판다. 후렴을 한 번 더 부르기 전에 나오는 드럼 독주는 모두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리고는 모두 후렴을 따라 부르며 떼창을 하고 춤을 추지 않았을까.


 노래를 듣고 밖으로 나오니 9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는 해가 늦게 져서 그제야 노을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캐번 클럽에서 나와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숨 막힐 정도로 조용한 리버풀 원 쇼핑몰 거리를 걷는데, 두 공간이 너무 이질적이라 방금 노래를 듣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면 무슨 꿈이었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듯이, 나도 캐번 클럽을 나와 똑같이 그랬다. 심장이 뛸 정도로 크게 울리는 음악을 듣다가 고요한 적막만이 감도는 현대적인 거리를 걸으니 꿈에서 깬 것만 같았다. 타임머신이란 게 정말 있다면, 과거에 갔다 현대로 돌아왔을 때 딱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 정도로 시공간을 초월했다는 느낌을 받은 장소는 살면서 없었다. 현대적인 2023년의 리버풀에서 가난한 항구 도시민들의 애환을 적셔주던 비틀스가 있는 1962년에 잠시 다녀왔다.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추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게 됐는데,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틀스는 자신들의 음악으로 고향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앳된 얼굴의 리버풀 청년 4인방은 약 60여 년이 지나서까지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을 거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리버풀과 세계를 한 공간 안에 묶어놓은 음악이란 존재. 실로 위대하다.


젊은 날의 폴 매카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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