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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스 May 17. 2023

영국 마트 털기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게 뭘까. 난 단연코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음식에 진심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도 다 잘 먹고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는가. 이렇듯 음식은 인간 삶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보니 음식이 있는 곳은 사람들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준다. 마트라는 공간은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나라의 기후, 식생, 토양, 문화, 국민성, 라이프스타일 등이 담겨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영국이란 나라의 마트는 어떠한 곳인지 한 번 털어봤다. 




1. 채소


한국 채소와는 다른 릭과 쿠르젯


우리나라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곳이 바로 채소 코너가 아닐까 싶다. 영국과 한국은 기후, 토양, 식생이 전부 다르다 보니 나고 자라는 식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종인 것 같아도 분명 다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릭(Leek)이다. 영국에서 요리하면서 가장 아쉬움을 느낄 때가 바로 이 릭을 사용할 때이다. 릭은 흔히 서양 대파라고 불리는데, 우리나라 대파보다 훨씬 두껍다. 맛이 더더욱 아쉬운데, 대파보다 매운맛이 적고, 엄청 달다. 그래서 릭 자체가 맛이 없다는 게 아니라 한국 요리와 어울리지가 않는다. 한국 요리는 매운맛이 포인트가 될 때가 많은데, 릭은 지나치게 달다. 오죽하면 백종원 선생님 유튜브의 파개장 레시피 영상에서는 릭은 쓰지 말라고 하셨다.


 쿠르젯(Courgette)도 한국의 애호박과는 너무 다르다. 쿠르젯은 흔히 주키니 호박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키니는 미국식 영어 단어이고, 쿠르젯은 영국식 단어이니 같은 호박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가지도 미국과 영국에서 부르는 말이 다른데, 미국에서는 eggplant, 영국에서는 aubergine이라고 한다.) 쿠르젯으로 애호박 전도 해보고, 된장찌개도 해봤는데 충분히 요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에서 먹던 느낌이 살지 않아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마트에 잘 없는 채소로는 향을 낼 때 사용하는 채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예로는 파슬리, 민트, 바질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이런 채소들이 자라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한식에는 파슬리, 민트, 바질이 전혀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 음식들에는 요리가 마무리되었을 때 장식용, 혹은 향을 입힐 때 이런 채소들이 쓰인다. 파스타는 요리 과정이 복잡하기 않기 때문에 영국에 와서 많이 해 먹었는데, 바질 잎 몇 개만 뜯어서 넣어도 최고의 요리로 재탄생한다. 한국에 파는 바질가루는 정말이지 저리 가라 수준이다. 향긋함이 비교가 안 된다.


2. 고기 & 치즈


고기 종류도 한국과 많이 다르다. 나라마다 좋아하는 고기, 좋아하는 부위가 다르니까 그럴 것이다. 아마 가장 많이 보이는 고기는 닭가슴살인 것 같다. 한국인들의 치킨 사랑은 대단한데, 영국인들도 닭을 참 좋아하나 보다. 그리고 소고기도 많은데, 한식과 영국 음식은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소고기라 하더라도 다른 부위를 판다. 한국 정육 코너에는 불고기 거리, 국거리가 항상 있다. 한식의 기본 아닌가. 영국은 불고기도 안 먹고, 미역국도 안 먹으니 당연히 그런 부위는 안 판다. 대신 스테이크를 많이 먹기 때문에 두꺼운 스테이크용 고기가 진공포장되어 판매되는 걸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구이용 소고기로는 살치살처럼 주로 얇은 고기를 파는 것과는 대비된다. 그리고 영국은 햄버거에 약간 미쳐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느 펍을 가더라도 버거를 판다. 한국 술집의 안주로 흔히 보이는 순두부찌개나 계란말이처럼, 영국은 햄버거 안주라고나 할까? 그 정도로 영국인들은 햄버거를 많이 먹는데, 그래서 그런지 한국과 다르게 패티도 마트에서 따로 판다. 어차피 번도 따로 팔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집에서 수제 버거를 만들어 먹기 매우 쉽다.


양고기


 한국에서는 잘 안 파는 고기를 팔기도 한다. 이렇게 집에서 양고기를 먹을 수 있게 포장되어 있는 건 한국에서는 못 본 것 같다. 양꼬치가 아닌 제대로 된 양고기를 먹으려면 한국에서는 꽤 많은 돈을 내고 외식을 해야만 먹을 수 있을 텐데. 더 신기한 것은 칠면조 고기였다. 칠면조도 가슴살을 많이 판다. 한 번은 닭가슴살을 살 계획으로 마트에 갔다가, 생긴 것만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집었다가 구워서 먹어보니 맛이 아예 달라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칠면조는 닭가슴살과 외형은 비슷하지만 식감부터 맛까지 차이가 있다.


영국 치즈


 치즈는 충격적일 정도로 많다. 빵이 주식이면 또 치즈가 빠질 수 없기에 인정한다. 내가 한국에서 봤던 치즈는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걸 영국의 마트에 와서야 깨닫게 됐다. 치즈로 유명한 프랑스나 이탈리아 치즈는 전부 제외하더라도 영국 자국만의 치즈도 이렇게나 많을지 몰랐다. 치즈를 자세히 보면 Lancashire, Cheshire, Gloucester, Wensleydale, Leicester, Cheddar 등 영국의 지명 이름이 쓰여있는 걸 볼 수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해남 치즈, 포항 치즈, 원주 치즈, 평택 치즈... 뭐 그런 느낌일까? 아마 이 마트에 없는 지방 치즈도 분명 많을 거라 생각한다. 각 지방별 치즈도 맛이 살짝씩 다를 테니 먹어보며 차이를 느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3. 빵


마트 안 베이커리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마트에 빵이 많을 수밖에 없다. 빵이 주식이니까! 한국 마트에 가보면 쌀과 잡곡 파는 코너가 크게 있다. 한국인들은 쌀이 주식이므로 쌀 소비가 많아 당연히 마트 입장에서는 쌀을 많이 진열해놔야 한다. 그리고 쌀 포대자루는 크기도 크기 때문에 마트 안에서 상당한 공간을 차지한다. 게다가 쌀이 다가 아니지 않나. 각종 잡곡 역시 쌀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영국은 그만한 공간을 모조리 빵에 할애했다고 보면 된다. 어쩌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쌀의 종류보다는 빵의 종류가 더 다양하니까. 마트에서 파는 빵이라고 한국처럼 대충 공장에서 찍어낸 빵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트 안에 무려 제빵기가 있어서 매일매일 구워내는 빵을 진열대에서 판다.


 스콘 하나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어질어질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프레첼, 식빵, 바게트, 크루아상이 나도 봐달라고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뽐낸다. 향긋한 밀가루와 버터 냄새에 베이커리 코너에 있는 빵이란 빵은 모조리 다 쓸어오고 싶다. 냄새 하나에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할 수 있다니. 빵을 좋아한다면, 영국의 마트는 가히 천국일 것이다. 모든 빵을 다 먹어본 건 아니라 마트 빵의 퀄리티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양은 마트 주제에 한국 빵집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4. 외국 음식


다양한 인종들이 거주하는 덕에 최근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식문화가 다양하고 역동적인 곳으로 꼽혀 자국 음식의 어마무시한(?) 평판을 조금씩 상쇄하고 있다. 이는 식당뿐만 아니라 마트에도 영향을 미쳐 세계 각국의 식재료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영국 마트에만 가도 간접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이탈리아의 라비올리 반죽을 포장해서 파는 걸 보고 한 번 놀랐다. 팟타이용 채소, 해물, 면, 소스 전부 다 따로 소분되어 있어서 그걸 그대로 사면 집 안에서도 방콕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심지어 파에야용 쌀을 따로 파는 것까지. 파에야용 쌀이 따로 있는지도 전혀 몰랐는데. 전부 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기에 놀라움의 연속이다. 각각의 식재료가 이렇게나 세분화되어 있는 걸 보면서 영국이 얼마나 다인종 국가인지를 마트에서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한국 마트와 달리 영국 마트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인도의 흔적이다. 영국의 식민지배 영향 때문인지 엄청난 수의 인도인이 영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가정집에서는 오뚜기 카레나 해 먹지, 인도 카레를 해 먹기란 여간 쉽지 않다. 재료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패스트푸드 수준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다. 꼭 향신료를 배합해서 카레를 끓이지 않아도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카레 소스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식당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난은 당연히 기본으로 팔고,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에서 생산되는 길고 얇은 쌀 품종인 바스마티 라이스도 진열대에 가득하다.


인도 음식이 이미 조리되어 판매 중이다


* 여담으로, 마트에 가면 치킨 티카 마살라를 많이 판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인도 음식이 아니다. 치킨 티카 마살라는 카레에 토마토퓌레와 크림이 들어간 요리로, 영국의 인도 음식점들에서 영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낸 요리라고 알려져 있다. 짜장면, 짬뽕을 중국 음식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요리가 기름지고 텁텁하고 뻑뻑한 영국 음식 사이에서 치킨 티카 마살라는 개인적으로 영국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맛이다.)




 가끔은 투게더 한 통 가져다 놓고 마음껏 퍼먹고 싶고, 항정살에 명이나물 싸서 먹고 싶고, 뜨근한 밥에 매콤 달콤한 갈치조림 한 점 얹어서 먹고 싶다. 하지만 전부 다 영국에서 찾아볼 수 없다. 아주 가끔은 한국 음식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이마트를 활보하고 다니면서 카트에 먹고 싶은 걸 왕창 쓸어 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영국 마트는 반대로 한국에 없는 게 많다 보니, 내가 언제 이런 거 먹어보겠나 생각하면서 오늘도 재밌게 장을 보고 온다. 확실히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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