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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Jan 28. 2024

우정에도 유효기간이 있나요?

여덟 번째 편지: 그때가 온다면 누구의 탓도 아니야.

가끔 사랑에는 적용이 되지만, 우정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유효기간'이 아닐까 생각했어. 대학 새내기 시절,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어하는 룸메이트에게 자신 있게 던진 위로로 '연애는 일시적으로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우리는 너에게 평생 소소한 웃음을 줄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마'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였어. 그런데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 믿음이 조금은 흔들리더라. 겨우 10년이 지났는데 말이야.


지난해 8월, 나는 28살의 나이로 결혼식을 올렸어. 스페인 남자친구와 함께 한국에서 지낼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으로 혼인 신고를 한지는 딱 일 년 만이었지. 비자와, 전세대출, 이사 그리고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식 준비를 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업무적으로도 일 년 중에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그 부담은 더 컸어. 하지만 이 나라에서 쫓겨날 걱정 없이 평생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힘을 낼 수 있었지.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을 앞두고 10년 지기 친구 S과 이별해야겠어. 아니, 그의 삶에서 멀어졌다고 하는 것이 덜 슬프겠다.


 수산 시장에서 가져온 싱싱한 회와 탐스러운 해산물로 멋진 한 상을 차리고 얼마 전 취업을 한 Y과 S를 초대해 가장 먼저 청첩장을 주는 자리였어. 나는 결혼식을 준비하며 겪었던 힘든 이야기, S는 회사에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던 썸 이야기 그리고 Y가 만난 이상한 상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 그러다 워홀을 가기 전 마지막으로 다녀온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출발 일주일 전 예상치 못한 결혼식 준비로 함께 차를 타지 못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쌓이게 되었어. 시간을 정해놓지 않아서, 나를 이해해 줄 거라 믿어서 얘기를 했던 것인데 그건 10년의 시간에서 생긴 나의 안일함이었어. 결국 여행 약속은 흐지부지 되었고, 사과는 그에게 닿지 않았지.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함은 기다림으로 그리고 슬픔은 지침으로 자연스럽게 변했어.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지. 


마지막 연락에 대한 답장을 기다리던 어느 날, 평소 존경하던 옆 팀 팀장님께 다시 연락을 해도 괜찮을지 여쭤보니 그러시더라. 20대가 넘어가면서 정리가 되는 관계들이 있는데,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갑자기 찾아온 이별에 나의 어떤 말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특히, 오래된 관계인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야. 그리고 우리의 그 빈 공간에는 마치 마법처럼 새로운 인연이 찾아올 거라고.


딱딱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말을 집에 오는 길에 내내 곱씹고 또 나의 상황에 적용해 보았어. 생각해 보니 우리가 멀어진 건 사실 그날 그 하루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그는 상위권의 성적을 내면서도 최선을 다해 20대를 보냈어. 비슷한 커리어를 생각하며 같은 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나에게 많은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지. 하지만,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했어. 그녀의 최선이, 나를 걱정해서 나온 수많은 조언들이 어쩐지 나를 더 불안하게 했거든. 취준을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봉사활동을 했던 필리핀으로 방학 내내 배낭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졸업을 하고 워홀을 가기로 결정했을 때, 아직 한국의 교환학생 신분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소개했을 때에도 그랬지. 함께 성공하자는 마음은 언제나 고맙게 느껴졌지만, 아마 나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꿈을 좇고 있었나 봐. 


그래, 그렇게 우리는 차츰 멀어져 왔던 거야.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19살에서 29살이 되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버린 삶의 가치관과 취향 때문에. 서로가 가장 힘들 때에도 가장 기쁠 때에도 언제나 함께 하길 바랐기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지만 이제는 마음 편히 20대의 우정을 보내주기로 마음먹었고, 그때 그것이 나에겐 마지막 연락이 되었지.


선배들은 종종 얘기해. 우리가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고, 이사를 가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죽고 못살던 친구들도 점점 정리하게 되고, 거의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만 곁에 남는다고. 나는 이 말을 조금 바꿔서 이해하고 싶어. 우리의 상황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맞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긴 가치관을 바탕으로 삶을 대하는, 그리고 대화를 하는 방법이 달라져서 그렇다고. 그러기에, 변화하는 상황에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서로가 더 많이 노력을 해야 한다고.


내가 잠깐 이곳을 떠나 있을 때에도, 이직과 결혼으로 인해 1년에 몇 번 보지 못했을 때에도 여전히 내 곁에 남아주는 친구들, 코로나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나의 필리핀 친구들과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그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


19살의 너는 처음으로 많은 친구들과 이별을 하게 되고 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야. 그 후 10년 동안 인생의 다양한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이에 대한 나만의 가치관도 생기겠지. 내가 오늘 편지에서 말하고 싶던 건, 인생의 대소사를 앞두고 있을 때마다 누군가를 잃게 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연애도,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모두 너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고 하나를 얻으면 사라지는 기회비용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그래도 만약 유효기한을 알게 된다면 100%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맞아. 우정의 유효기간은 여전히 없어. 하지만 이를 지키고 싶다면 이것만큼은 약속해 줘. 너의 인생에 중요한 순간들에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다른 것들을 우정 위에 우선순위로 두지 않겠다고.


너의 일상이 다양한 관계와 이유들로 다채롭게 펼쳐지길 바라며, 오늘의 편지도 이만 줄일게. 다음 주에 다시 만나!


** 일상에서 저의 브런치를 공유하는 사람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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