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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Feb 11. 2024

연애할 때는 부캐 버리기

열 번째 편지: 좋아한다는 이유로 진짜 너를 잊지 마

나의 첫 번째 연애는 19살, 대학교 1학년 때였어. 여중 - 여고 - 여대라는 당시 말하는 '수녀 라인'을 탔던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기숙사 룸메이트가 주선해 준 소개팅으로 첫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지. 그와의 겨우 60일이라는 짧디 짧은 연애 후에는 몇 사람들을 더 만났었는데, 모두 다 나에게는 상처로 남거나 거의 기억이 없어. 나쁜 결말은 빠르게 지우는 편이라. 그러고 나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지. 연애에는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던 내가, 둘 보다는 혼자가 편하다고 느꼈던 내가 관점을 바꾸고 결혼까지 한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 앞에서는 그냥 나다울 수 있었다는 거야.


맞아.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척을 많이 했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말하는 부캐를 만들어 낸 거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느 정도의 '척'은 한다고 해. 평소에는 소주 2병을 먹어도 거뜬한데 속도를 맞추려 일부러 못 마시는 척을 한다던가, 평소에 보지도 않던 마블 영화에 관심 있는 척을 한다던가, 배달 앱 VIP이면서 요리를 잘하는 척을 한다던가 말이야. 이런 척들은 시간이 지나고 진실을 알게 되어도 '그땐 그랬지' 하면서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귀엽고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이걸 넘어서 불편하고 싫은 상황에서까지 참으면서 다 괜찮은 척하는 연기를 하고 있었어. 연애는 행복하기 위한 것이지 일이나 봉사가 아니었는데, 나의 돈과 에너지 그리고 마음을 쓰면서 하는 연애 앞에서조차 나다울 수 없었던 거야. 미팅이나 소개팅하는 자리에서는 누군가의 선택을 받고 싶어서, 그 이후에는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설정한 부캐는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걱정 따윈 없고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쾌활한 사람이었어. 술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고 야한 농담 따위도 가볍게 받아칠 수 있는 쿨한 면도 있어서 누구나 좋아하는 외모는 아니어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사실 10년간 학교에 처박혀 대학 입시라는 목표 하나만 두고 살다가 누군가를 만나보려 하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몰랐기에 처음에는 내가 만든 부캐와 나의 본캐와 다른 걸 인지하지 못하기도 했어. 연애를 하면서 진짜 나의 모습을 알고,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이 그리 멋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 속에서 다치고 후회하는 것은 나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던 것 같아. 이래서 나를 잘 알아야 연애도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있나 봐.


이름과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옷차림만은 선명하게 기억나는 첫 남자친구는 언제나 내가 아름다운 꽃처럼 입기를 원했어. 자기는 매일 축 늘어진 카고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면서 말이야. 소개팅 때 입었던 분홍분홍하고 노출은 없어도 몸매가 드러나는 옷들을 좋아해서 마치 나를 만난 것이 그때 하루 빌려 입었던 친구의 옷 때문인가 혼란스럽기도 했지. 깜짝 데이트를 하자며 그가 요청한 짧은 머메이드 치마와 쫄쫄이 크롭티 그리고 발 볼이 삐죽하게 나와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분홍색 웨지힐이 아직도 생각이 나. 한 번의 데이트를 위해 하루 넘게 두부과자 한 봉지랑 바나나 2개만 먹었었는데, 내가 평소에 자주 입고 가장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진짜 나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너는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 참, 그 깜짝 데이트로는 동네에 있던 CGV 그리고 기사식당에 가는 게 전부였다면 믿을래?


연애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돈'이라고 생각해. 누가 계산을 할지 눈치 보지 않고, 상대방이 계산하는 걸 불편해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고마워할 줄 아는, 그리고 자신의 경제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나는 진짜 연애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어.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만났던 사람에게도 나의 본캐를 보여주지 못했어.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로 와서 학교 근처의 작은 셰어 하우스에서 살고 있던 나는 달에 50만 원의 용돈을 받고 있었는데, 이건 지금이나 그때나 숨만 쉬어도 통장에서 사라지는 금액이었지. 나의 부캐는 매주 나가는 데이트 비용이 너무나 부담스럽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어. 절대 부자는 아니라도 데이트하고 나면 하루 이틀은 라면으로 버텨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래서였을까, 나를 오해한 그는 계산을 할 때만 되면 매번 화장실로 사라지곤 했지. 그래서 연애를 할 때는 취향뿐 아니라 경제적인 것도 솔직하게 나누는 것을 추천해.. 물론, 이걸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는 게 먼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 마포에 있는 굉장히 비싼 아파트에서 가족이랑 살고 있더라. 쳇. 


마지막으로 정말 정말 후회하는 '척'은 바로 스킨십에 관해 괜찮다고 했던 것이야.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해서,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스킨십을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때 나의 거절은 튕기는 걸로만 보였나 봐. 원하지 않는다는 나의 말에 그들은 이렇게 반응하더라. '내가 너 남자친구잖아. 좋아서 만난 거 아니야?' 그리고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만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이야. '안 좋은 기억들 내가 좋게 만들어 줄게.' 쿨하고 열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성적 농담을 더 이상 섞지 않는 이유야. 남사친들과 있을 때와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거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만나지 않길 바라며, 동의 없이 하는 스킨십은 범죄라는 걸 기억해 두자. 


몇 년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캐를 가지고 누군가를 만나다 보니 가장 큰 단점은 연애도 하나의 일정처럼 느껴졌다는 거야. 달력에 데이트 날짜를 표시하고, 어떤 걸 준비해야 할까, 어떤 걸 보여줘야 계속 날 좋아할까 끊임없이 눈치 보고 고민하면서 나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했지. 휴식과 행복을 얻어야 할 순간들에 귀찮음이 대신하고 연애에서도 번아웃을 경험했던 것 같아. 게다가 머리로는 잊어도 몸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서 몇 년간은 누군가의 손이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고, 좋은 사람을 만났어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어.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4년간 연애를 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해. 


퍼스널 브랜딩이 필수라는 요즘, 나의 부캐로 새로운 파이프 라인을 확장해 가는 것도 좋지만 연애에서만큼은 나의 본캐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누구에게든 처음은 어렵고 하면서 배워가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너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주고 함께 있을 때 편안하고 재미있는 사람과 다가올 20대를 함께하길 바라며, 그 과정에서 연애가 주는 짜릿한 행복과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온전히 네 모습으로 느껴보았으면 해. 


그럼, 오늘은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배타미(임수정)가 박모건(장기용) 에게 했던 대사로 편지를 마칠게. 


"박모건, 여기가 내 일상이야. 나의 일상에 온 걸 환영해" 

[출처] TVN WWW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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