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편지: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도 나에게.
나에게는 아주 천천히 올 줄 알았던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지금, 친구들 사이에서 조금함과 불안함의 기운이 자주 느껴지곤 해. 2-3년 전까지만 해도 진로와 취업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거기에 연애와 결혼까지 더해졌지. 아무래도 결혼식에 가장 많이 초대를 받는 시기라 그런지 평소 이런 주제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친구들도 '결혼을... 해야 하나? 아니, 결혼은 무슨 연애는 할 수 있을까? 괜찮은 사람들은 이미 다 결혼한 거 아닐까? 내 짝은 있을까? 근데 자금은 어떻게 모아?'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하고, 서서히 강도가 세지는 부모님의 압박과 잔소리에 명절 때도 고향에 내려가는 것을 힘들어하기도 해. 그런 고민들을 듣다 보면 우리도 이제 어른이 된 건가 싶기도 하면서 입시, 취업을 넘어 이제는 연애와 결혼까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이상한 나이 시스템 안에서 남들보다 뒤처질까 걱정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슬프기도 하고. 겨우 네 나이에서 10년이 흐른 건데 해결이 되는 건 없고 고민할 게 하나씩 늘어간다니. 참 이상하지?
자, 운 좋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이라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는 상상을 해보자. 여기서 끝이 아니야. 이제는 더한 질문 세례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결혼식은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집은 어디에 구할 것인지 전세인지 매매인지, 대출은 무엇으로 얼마큼 받을 것인지, 아이는 언제쯤 몇 명 나을 것인지, 차는 뭘로 뽑을 것인지, 직장은 같은 곳에서 계속 다닐 것인지 등등. 설레는 연애 스토리의 끝에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기대감이 현실 앞에서 비 온 뒤의 장작처럼 식고 말지. 나 역시도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바로 '집'에 대한 것이었어. 둘 다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고 20대 중반과 후반이니 매매라는 비현실적인 단어는 꺼내지 않았지만 전세와 아파트는 기본 옵션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 같아. 서울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인 나의 고향에서는 이게 신혼부부의 가장 흔한 주거 형태였거든.
이렇게 가족, 친척, 친구들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들과 함께 웨딩 카페의 수많은 글들은 괜스레 나를 주눅 들게 했고, 둘만 좋으면 되지!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같이 살 생각에 행복만 가득했던 외국인 예비 남편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꽤나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아. 사실 내가 원하던 것도 그게 아닌데 말이야. 떨어질 걱정 없이, 이 나라에서 쫓겨날 걱정 없이 함께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걸 선택하고, 수개월이 걸리는 비자까지 마무리했던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나의 든든한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어. 가장 정신없을 시기에, 온전히 나로 빛나도 부족할 시간에 또 다른 눈치와 압박으로 쓸모없는 감정 소비를 하지 않기를 바라며 너는 꼭 이 두 가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어.
하나,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성향과 취향에 따른 선택이다. 마치 학교 진학이나 취업처럼. 내가 함께 근무하고 있는 회사 동료들의 대부분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 비혼주의자라고 하기보다는 굳이 결혼을 내가 꼭 이뤄내야 할 인생의 체크 리스트가 아닌 거지. 지금 내 삶이 바쁘고 만족스러우며, 누군가와 함께 나의 모든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 귀찮고 나 자신도 누군가의 삶에 간섭하기 싫으니까. 또, 평생 함께할 사람이 생기면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든 더 풍성해질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짐처럼 느껴질 수도 있잖아. 매일 뉴스에서는 낮은 출생률로 곧 나라가 소멸될 거라고 잔뜩 겁을 주며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2030 세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데, 내가 더욱 행복할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 어떻게 사회가 원하는 결정을 할 수 있겠어. 그냥 모두의 선택을 응원하되, 그 선택에 따른 다양한 지원을 해 주면 좋겠어.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인정해 주는 것도 포함해서!
둘, 행복한 결혼 생활의 기준은 내가 정한다.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도 나니까. 얼마 전 결혼식을 올린 친구 J는 단 하루를 위해 1년을 준비하는 결혼식 대신 3개월의 배낭여행을 떠나는 걸 택했어. 처음 결혼을 시키는 첫째 딸의 결정에 부모님은 난리가 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화해를 하지 못했다고 해. 또 다른 친구 Y는 파트너의 동의하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명절 때마다 모든 친척들의 압박을 견디는 중이지. 그리고 나 역시 결혼 전 1년 간 동거를 하겠다고 하며 결혼을 하더라도 향후 몇 년간 집이나 차에 돈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어. 우리가 감당이 가능한 선 안에서 서울의 작은 빌라에서 월세로 동거를 시작했지. 당연하게 생각되는 거부할 때 이 선택들이 하나의 반항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우리 안의 우선순위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J에게는 하루의 추억보다는 평생 기억에 남을 파트너와의 여행이, Y에게는 엄마가 되는 것보다는 커리어의 성공이, 그리고 나에게는 남들의 시선보다는 그를 깊게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처럼. 물론, 선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필요해.
앞선 편지에서 함께 나눴던 진로나, 취업, 우정 그리고 사랑까지. 사회에서 만들어진 기준에 따라 남들의 눈치를 봐야 할 때도, 아직은 이 모든 게 낯선 어른들과 마찰이 있을 때도 있겠지만, 언제나 모든 선택의 키는 네가 쥐고 있다는 걸 기억하길 바라며 오늘 편지도 이만 줄일게.
가장 설레어할 사랑스러운 순간에 불필요한 소리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정답을 찾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어렵지만 나도 내 마음의 소리에 더욱 솔직해져 볼게.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