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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Nov 18. 2020

영화 <윤희에게>와 갈치조림

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갑작스러운 실직을 맞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아빠의 레시피와 아직도 무직인 딸의 소담한 일상을 같이 씁니다. 우리 부녀는 (비록 직업은 없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Ep. 1

참으로 감질나는 겨울이다.

한동안은 날이 꽤나 추워 벌써 겨울인가 했더니만 어제오늘은 영락없는 가을 날씨다.

추운 건 딱 질색이라지만 올 듯 말 듯 오지 않으니 겨울에 괜한 서운함 마음도 든다.


그래서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겨울' 하면 떠오르는 영화 <윤희에게>를 보았다.

(몸 튼튼하고 마음 건강한 무직자 딸의 하루는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알람 소리 없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직장이 없는 삶에 잠시 슬퍼했다가 또 언제쯤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착잡해했다가 우울한 감정을 떨치고자 일단 씻는다. 씻고 나면 또 힘이 나서 좋아하는 일을 하러 떠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방 밖은 온통 흐리고 뿌연데 화면 안은 좀체 그칠 줄 모르는 눈으로 가득하니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추운 건 싫지만 눈은 언제나 좋다.

작년엔 영 눈 구경하기가 어려웠는데 올해는 눈이 좀 오려나.

어차피 갈 데도 없는데 올 겨울에는 따뜻한 방 안에 앉아 눈 구경이나 실컷 했으면 좋겠다.


*무직자 딸의 영화 <윤희에게> 감상평이 궁금하다면 매거진 <호! 화가> 참고.





무직 딸의 잉여 라이프 이야기는 각설하고-


그래서 오늘 아빠의 첫 요리는!

갈치조림이다.


어릴 적 나는 고등어나 굴비는 생선 취급도 않는 갈치 덕후(aka 갈치 악개)였다.

아빠는 밥 한 공기에 갈치 한 토막을 뚝딱 해치우는 나를 보고서는 "쟤는 입이 너무 고급이야."라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고 "등 푸른 생선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하며 오메가 3를 예찬했다.

딸내미 먹여 살리느라 등골 빠진다며 앓는 소리를 하던 아빠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언제나 내 입이 고급인 것에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내 밥상엔 고등어보다는 갈치가 더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렴 뭐든 저급보단 고급이 낫지 않나.  

그가 고급 입맛을 가진 딸에게 양가감정을 느낀 것은 백분 이해하는 바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입맛이 변한 딸은 이제 생선은 비리다며 쳐다도 보지 않는다.

종종 본가에 갈 때면 아빠는 습관처럼 "갈치 구워줄까?"하고 묻지만 그때마다 내 답은 "NO".

"옛날에는 그렇게 좋아하더니..." 하며 말을 줄이는 아빠를 볼 때면 다 커버린 내가 또 그를 쓸쓸하게 한 것은 아닌지 괜스레 마음이 짠해진다.

품 떠난 지 오래인 딸이지만, 요즘도 여전히 내가 제 품 안의 자식일 때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일 때면 어김없이 조금 슬퍼지는 아빠다.




*

아빠에게 레시피북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내심 아빠의 첫 요리는 뭐가 될까 기대했는데 갈치조림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빠도 갈치를 많이 좋아했던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미안 아빠. 앞으로 잘 살필게.)


아무튼 레시피북의 시작이 갈치조림인 것이 꽤 새롭다.

이제 갈치를 먹지 않는 나를 보며 쓸쓸해하던 아빠의 모습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그의 첫 레시피가 갈치조림인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아빠는 내가 "NO갈치"를 선언했을 때, 그저 갈치 팬덤에 이탈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슬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도대체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지?" 하는 진심 어린 아쉬움일지도.








갈치조림 레시피


필요한 재료: 무 1개, 갈치 4토막, 익은 파김치, 진간장, 설탕



1)

무는 두툼하게 썰어서 냄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깨끗이 손질한 갈치를 올린다.



2)

진간장 다섯 숟가락 넣는다.


3)

그 위에 익은 파김치를 잔뜩 올려준다.

(대충 잔뜩, 밑에 깔린 갈치와 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넣어주면 되는 것 같다.)


4)

김치 국물을 약간 넣은 후 물을 자박하게 넣는다.

그리고 갈치와 무에 양념이 잘 밸 때까지 졸인다.

(대략 온 주방에 갈치조림 냄새가 가득 풍길 때까지 졸이면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필요한 재료에는 설탕이 있었는데, 설탕은 어느 단계에서 넣으신 건지.

요리사님께서는 언제 넣었는지 까먹으셨다고 한다.



+정밀한 설명이 없는 요리사 아빠를 위한 변:

즉흥 요리사는 계량과 설명에 서툴다. 요리 똥손들에게 '약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것인지, 단계를 생략한 레시피는 얼마나 무용한지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5) 갈치조림 완성!




*

무릇 야매요리의 특장점은 간단함이다.

갈치조림을 이렇게 간단하게 만들다니 난 아빠의 요리 실력에 또 한 번 감탄한다.

 

하지만...

예쁘게 담긴 갈치조림 사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쳐도 완성샷 하나 없는 레시피라니, 이게 웬 말인가!


레시피북에서 제일 중요한 요리 완성샷은 어디에 갖다 팔아 먹었는지 이실직고해보자면


첫 시작답게 어딘가 삐끗삐끗.

다음에는 완성본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요리사님.


+레시피 / 사진 출처 :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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