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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Dec 16. 2020

수국과 잡채

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갑작스러운 실직을 맞아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아빠의 레시피와 아직도 무직인 딸의 소담한 일상을 같이 씁니다. 우리 부녀는 (비록 직업은 없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Ep. 5

수국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아빠는 집에 수국 화분을 들였다. 꽃에 대해서라면 별다른 지식이랄 게 없는 내 입장에서는 '수국'을 '화분'에 '키울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아빠가 원예에도 꽤나 큰 관심(이라 쓰고 재능이라 읽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가끔 본가에 갈 때면 아빠는 그간 자신이 키운 식물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 내게 자랑해 보이곤 한다.

효발아, 이거 봐라. 여기 꽃 폈다.

고무나무, 게발 선인장, 군자란, 벤자민.

나는 이 식물들의 이름을 아빠를 통해서 처음 알았다.


아빠는 베란다 한 편에 놓인 식물들을 살뜰히 보살폈다. 화분마다 다른 물 주기를 꼭꼭 기억해뒀다가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물을 주었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식물에는 영양제를 꽂아 주고, 분갈이도 혼자서 척척 해냈다. 집에 갈 때마다 몇 개씩 늘어나 있는 원예 용품들을 볼 때면 나는 아빠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괜히 뭉클하기도 했다. 꽃과 식물을 살뜰히 어루만지는 지금의 저 손이 이제껏 어떻게 쓰여 왔는지, 나는 알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에는 아빠도 엄마도 내게 아빠가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어릴 적, 아빠의 직업을 공유하는 친구들 틈에서 다소 난처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나는 그저 아주 어렴풋이 아빠가 가죽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알고 있었을 뿐 자세한 건 몰랐다.


그 시절, 아빠는 여름이 되면 매일매일 조금 더 새카매진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여름의 끝에는 흑인이 된 아빠를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그런 상상도 했었다. 엄마는 매 해 여름이 오기 전이면 끈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외선 차단지수가 높은 선크림을 찾아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다. 까매지다 못해 살갗이 빨갛게 일어나는 아빠의 피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엄마의 정성을 몰랐는지(알았겠지) 선크림을 바르고 땀이 나면 눈이 따갑다며 선크림을 가지고 출근하기를 극구 사양했다. 여름마다 반복되는 집안 풍경을 바라보며 모르긴 몰라도 아빠는 실외에서 일을 하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건 전부 아빠의 무뚝뚝함에서 비롯되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지, 왜 여름이 되면 매일매일 점점 더 까매지는지에 대해 어린 딸에게 설명할 말재간(혹은 의지)이 없었다. 집 밖에서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과정이 괜스레 낯부끄럽고 멋쩍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나’에 대해 말하는 일이 늘 그렇듯이. 그도 아니면 그저 어린 딸의 "왜?" 폭탄이 귀찮았을 수도 있다.


아빠가 실직한 이후, 나는 아빠에 대해서 알게 된 것들이 더 많아졌다. 아빠의 수다스러움이 실직과 얼마만큼의 연관성을 갖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렴, 나는 실직 이후의 아빠가 퍽 좋다. 그의 말 마디마다 묻어 있는 장난기도, 꽃과 식물을 보살피는 섬세한 손도 모두 좋다. 일에서 멀어진 아빠는 일로 바쁠 때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활기가 넘친다. 아빠를 보고 있자면 다정과 활기는 편안함에서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조금 더 빨리 직장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더이상 그의 피부양자가 아닌 미래를 꿈꾼다. 그가 지금처럼 쭉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 요리, 식물 키우기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해마다 더 가혹해지는 여름이 아닌가.




명란 잡채

필요한 재료: 당면 한 주먹, 팽이버섯 1봉, 당근 1/2개, 새송이 버섯 1개, 파뿌리, 양파 1 개, 간장, 올리고당, 참기름, 명란 1.5 개


1.

먼저 당면을 불려준다.


(얼마큼...? 얼마큼 불려주는 건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2.

팽이버섯, 당근, 양파, 새송이버섯, 파를 길게 썰어 준비해준다.


3.

(이렇게 갑자기 완성에 가까운 사진이라니.)


생략된 중간 과정 설명:

(1) 프라이팬을 예열한다.

(2) 예열된 프라이팬에 분량의 참기름과 식용유를 넣고 기름이 달궈지면 썰어둔 당근을 넣고 볶는다.

(3) 당근의 숨이 살짝 죽으면 소금을 한 꼬집 넣는다.

(4) 썰어둔 파와 양파 투하. 소금을 또 한 꼬집 넣는다.

(5) 파와 양파의 숨이 죽으면 팽이버섯과 새송이버섯을 마저 넣는다. 소금을 한 꼬집 더 넣어준다.

(6) 재료들이 잘 섞이도록 볶아준다.


4.

(이렇게 갑자기 완성 사진이라니.)


생략된 중간 과정 설명 2:

(1) 불려둔 당면을 삶는다. (- 얼마큼? - 이제 먹어도 좋겠다 할 때까지..?)

(2) 볶아 놓은 야채에 삶아진 당면을 넣은 뒤 간장 3스푼, 올리고당 반 스푼 넣고 볶아준다.

(3) 명란을 잘게 썰어서 넣는다.

(4) 참기름을 약간 추가한다.

(5) 기호에 따라 깨도 뿌린다.  


*

그 복잡하고 귀찮다던 잡채까지 섭렵한 아빠의 요리 인생을 응원하며-

레시피/사진 출처는 모두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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