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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학용 Nov 23. 2020

#11 길 위에서 낯선 세계가 익숙해질 때

라다크 레 주변 곰파 투어

도시 레를 벗어나, 강을 따라 마음 닿는 데로 달리면 라다크 전통 마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곳 마을에는 오래된 곰파 Gompa(사원)가 하나쯤은 있고, 라다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들은 3대의 지프에 나누어 타고 하루 동안 라다크 마을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첫 목적지는 라다크를 통틀어 가장 큰 사원이 있다는 해미스 Hemis. 가는 길이 평화롭다. 길은 논과 밭을 끼고 이어지고, 지프는 그 끝자락에서 산을 파고 돌아 위엄 있고 고풍스러운 곰파 앞에 여행자들을 내려놓는다. 


목재 건물의 곰파 내부는 흡사 미로처럼 작은 방들이 좌우상하로 규칙도 없이 이어진다. 아이들은 모둠별로 흩어졌다. 나는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을 지나다 맑은 염불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곳에서 작은 이야기를 만난다. 주황색 승복의 스님이 낮은 소리로 염불을 하고, 그 맞은 자리에서 젊은 여인 둘이서 염불소리보다 더 낮은 얼굴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도 이야기의 제목은 ‘간절함’이 될 수 있겠지.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다 들르게 되는 사원에서 내가 마주치는 감정은 언제나 간절함이다. 네팔 안나푸르나 산골에서 흰색 바람벽에 앉아 마니차를 돌리던 동네 노인과, 이란 쉬라즈의 이슬람 사원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대고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도를 올리던 남자와, 이스라엘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차가운 돌길에 무릎 꿇고 앉아 눈물을 글썽이던 앳된 얼굴의 수녀님….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나는 보편적 인간을 묶는 유일한 기준이 어쩌면 간절함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때마다 난 내 삶에 주어진 간절함에 대해 생각한다. 가끔 삶이 팍팍하고 쓸쓸할 때마다, 간절함에도 총량이 있다면 나는 나의 20대에 내 삶의 간절함 대부분을 앞당겨 사용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남수와 민아와 다혜가 침묵으로 따라 들어와 바닥에 앉는다. 


‘저 아이들에게 간절함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 정성껏 마니차를 돌리던 고등학교 1학년 다혜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대학 합격을 말했다. 그렇겠지. 아마 다른 아이들의 소원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너나없이 같은 소원을 가지게끔 하는 곳이 우리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라다크 곰파(사원) 해미스에서

그들을 그들만의 간절함 속에 두고 방을 나온다. 계단을 따라 몇 개의 방을 올라, 옥상에 다다랐다. 스님 몇 분이 색 바랜 탱화 보수 작업을 하고 있다. 난간으로 나아가 마당을 내려 본다. 두 개 모둠 아이들이 그곳에 있다. 다리 쉼을 하는 아이가 있고, 자세를 바꿔가며 셀프 사진을 찍는 아이들이 있고, 수다를 떨다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있다. 나는 또 궁금해진다. 무엇이 저토록 내내 즐거울까. 그래서 내려가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여행 재미있어?” 

“네~!”        


1초의 망설임도 없다. 그래서 다시 물어본다.


“왜? 뭐가?”

“그냥요!”,  “다요!”,  “노는 거요.”,  “한국음식도 있고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그냥 좋은 것이다. 그냥 다, 즐거운 것이다. 한국에서는 매일 먹었던 한국음식을 가끔(!) 먹으니까 좋은 것이고, 매일 놀고 놀고 또 노니까 좋은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망설임 없이 그냥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의 자신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와 길 위에 서 있는 지금 이 시간, 그 자체가 좋은 것인지도. 


벌써 14일이 지나갔다. 오늘 곰파(사원)에 갔다. 우리나라와는 스케일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소승불교고 여기는 대승불교여서 더 색다른 구경이었다. 또 곰파에 승려가 1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달라이 라마 사진이 있다. 여기 히말라야는 빙하가 여름에도 안 녹는 만년설이 있어 더 멋지다. 보는 곳마다 모든 게 볼거리다. 한국인 누나가 하는 게스트하우스 여기에 와서 더 영어가 좋아진다. 외국인이랑 대화를 하면 와 내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신기함이 더해진다. 오늘은 못 잊을 날이 될 것이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남수)       

지프를 타고 간 첫 번째 목적지는 해미스 곰파다. 라다크에서 제일 큰 절이고 1630년에 만들어졌으니까, 지금 382살이다. 와우~ 오래되었음. 모둠끼리 사진도 같이 찍고 막 돌아다녔다. 우리 모둠에서는 유진 언니만 빼면 트래킹에서도 선두로 갔고 잘 걷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스피드는 거의 최고였다. 내려오는 길에는 넘어져서 다리에 큰 상처가 나기도 했다. ㅠ.ㅠ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민아)     

또 하나의 오래된 곰파가 있는 마을 틱세 Tikkse에 들렀다가 간단히 점심을 먹고 쉐이 Shey 궁전을 돌아본다. 틱세 곰파는 아슬아슬한 언덕 위에 지어져 사원이라기보다 성곽의 위엄을 지닌 반면, 쉐이 궁전은 여기저기 허물어진 성벽 때문에 오히려 쇠락한 사원 같다. 


하지만 반복되는 사원 투어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은 간절함 대신 지루함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 그들에게 간절함이란 레로 돌아가 시장과 골목을 돌아다니고, 쇼핑을 하고, 레스토랑을 탐방하는 일일지도. 곰파와 궁전이 라다크 인들의 오래된 문화를 보여준다면, 레의 시장과 길거리와 레스토랑은 라다크가 나아갈 문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간절함은 정방향이다.


이른 오후에 레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 넓은 정원에는 아이들이 널어놓은 빨래가 타르초인 양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몇몇 다른 여행자들이 해 바라기를 하며 의자에 앉았거나, 바람 빠진 매트리스에 누웠거나, 이 빠진 찻잔을 든 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먹에 누웠던 주인장 수미 씨가 기다린 듯 반갑게 아이들을 맞아준다. 누군가 기다려주고 반겨준다는 것만으로 여행자는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법이다. 


여기에서 잠깐, 수미 씨와 그의 남자 친구 겟쵸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국인인 수미 씨는 홀로 라다크로 여행을 온 여행자였다. 그녀는 영화에서처럼 레라는 도시에 꽂혔고, 그렇게 레에서 4개월을 지내는 사이 남자 친구가 생겼으며, 이제 남자 친구와 함께 이국의 땅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수미 씨가 아니라 그녀의 남자 친구 겟쵸였다. 히말라야 트래킹을 알아보기 위해 여행사를 알아보던 중 그를 만났다. 그의 성실함에 믿음이 가서 그가 매니저로 있는 여행사와 트래킹 계약을 하게 된 것이다. 계약을 마치면서 겟쵸가 한국말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고산증으로 힘들어하던 아이들을 병원으로 데려가도록 도와주었던 이도, 트래킹 때 가이드 지미 편으로 손수 담근 김치를 보내주었던 이도 바로 수미 씨였다. 


그들의 게스트하우스에는 자유로운 공기가 떠다녔다. 말하자면 굳이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고 숙소에만 있어도 좋은 그런 곳 말이다. 아이들이 훗날 이곳과 이들 커플을 기억할 때, 우리들이 살아가며 선택할 수 있는 삶에는 다양한 색과 모양이 있음을 떠올리기를. 


레에서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거리를 쏘다니고, 나는 오후 늦은 시각에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는 풍경을 보러 갔다. 샨티 스투파 Santi Stupa에 이르기 위해서는 30분가량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다. 하얗고 둥근 티베트 탑 아래에는 벌써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해가 붉은 핏덩이를 토해내고 구름마다 노랗거나 푸르거나 오렌지 빛깔의 색이 입혀졌다. 예쁘다. 

라다크  레, 산티 스투파에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풍경

석양을 기다리는 여행자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도 이 붉은 아름다움 앞에서는 어떤 제약이 있을 리 없다. 독일에서 온 여행자는 그림을 그리는데, 검은 도화지다. 검은 배경에 색깔 하나씩을 입힐 때마다 하얀 스투파가 살아나고, 노을이 물길처럼 형태를 얻고, 바람도 구름도 흔적을 남기면서 그림이 점점 예사롭지 않게 변해간다. 


그 옆에서 서양인 출신의 스님이 수염 덥수룩한 인도 아저씨와 나누는 이야기가 사뭇 진지하다. 그들의 언어에 근접할 수 없는 나로서는 이야기보다는 그들의 실루엣을 담아내는 석양이 더 흥미롭다. 또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젊은 커플이 자신들의 카메라 속 세상을 보며 나누는 이야기가 살갑게 들여온다. 그때 이목구비가 또렷한 인도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라다크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논다. 아이들을 보며 흐흐흐 웃고 있는 호주 친구들은 촌스러워서 더 친근하다. 부릉부릉. 모토바이크 인도인 라이더들이 이곳까지 올라왔다. 부릉부릉.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이다. 이 모든 풍경들이 석양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풍경 안에는 물론 나도 있다. 내가 다른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사진 속에 담듯이, 나 역시 그들의 사진 속 이야기로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여행일지도. 여행자는 석양을 기다리고, 석양 속에서 서로에게 그림이 되고, 이야기로 남게 되는 것.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해가 사라지기도 전에 반대쪽 산 너머에서 안개구름을 먹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해가 가기도 전에 달이 오듯이 우리들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정호와 정민을 만났다. 그들은 통통 뛰어다닌다. 레에서의 마지막 날을 위해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작은 파티를 할 거라 했다. 아이들은 고소에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다. 3박 4일간의 시골마을 홈스테이와 4박 5일간의 히말라야 트래킹을 무사히 끝마쳤다는 일종의 성취감 혹은 자신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레의 산소와 골목골목 길들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드디어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길 위에서 낯선 세계가 익숙해질 때, 여행자는 떠날 시간을 감지한다.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계를 여행자는 잘 견디지 못한다. 나에겐 삶도 그랬다. 삶이 나의 자리에서 더 이상 열정적이지 않다고 느낄 때, 또 다른 삶으로 떠나곤 했으니까. 

라다크 레, 해미스 곰파

그날 저녁 생일 파티가 있었다. 우리들은 마당 쉼터 바닥에 둘러앉았다. 난 전날 레 시내를 다 뒤져 겨우 사온 생크림 케이크를 내놓았고, 몇몇 아이들은 함께 준비한 옷을, 예인이네 모둠에서는 맥주 한 병을 꺼냈다. 고산증을 조심하느라 금지시켰던 맥주를 그날 처음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한 명씩 노래를 불렀다. 자유로움이 우리들을 감싸고 있었다. 여행학교는 학교이지만, 반드시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거나, 또는 무엇을 해내기 위해 떠나온 여행은 아니다. 다만 각자의 떠나온 이유를 찾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해보았다는 충족감,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처럼.      


엄마 아빠께

엄마 아빠 잘 지내세요? 나는 지금 ‘레’에 있답니다. 여기 하늘 정말 이뻐요. 지대가 높아서 그런가 하늘과 더 가깝게 느껴져요. 손만 뻗으면 하늘과 닿을 것처럼 느껴져요. 또 밤에는 별이 얼마나 많은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별들은 처음 봤어요. 엄마 아빠랑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쉬워요. ㅠ.ㅠ  3박 4일 동안 작은 마을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마을도 이쁘고 홈스테이 집 할머니랑 아주머니랑 다 잘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왠지 이 엽서를 내가 집에 가고 나서 받을까 봐 걱정이 되긴 하네요.ㅎㅎ. 저는 정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곳에 여행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어린 여행자들의 엽서, 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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