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루리 Jul 28. 2022

분리된 기억의 세계(고바야시 야스미)를 읽고..

기억상실을 소재로 한 작품은 참 많습니다. 기억을 잃은 그들이 거대한 음모에 맞서는 스릴러물로 발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으려는 로맨스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 남아있는 사람과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할 때 독자들의 감정은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특정인물의 기억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이들의 기억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면 과연 어떨까요?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요? 발상의 전환은 이토록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파생합니다. 한편으로 한발짝 앞을 들여다 보면 분명 쉽게 상상해 볼만한 세계이지만.. 이를 글로 전환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의 소설 '분리된 기억의 세계'입니다. 

소설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앨리스 죽이기'로 유명한 일본작가 고바야시 야스미(2020년 별세)의 2016년작품입니다. 전작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인간의 기억과 관련한 작가의 상상력은 참으로 무궁무진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대화체로 진행하는 문체적 특성또한 한 몫합니다. 고바야시 야스미는 잠재의식을 인간의 기억과 결부지어 다양한 이야기들을 파생시키곤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은 그 상상력의 한계가 극에 달한 기분이었습니다. 

전세계 모든 인간의 기억이 10분의 시간이 지난 후 사라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그야말로 세상은 아비규환이 되지 않을까요? 인류는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요? 가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마냥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는 종족이니까요. 처음에는 자신이 기억상실을 겪고 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사이에 단절을 알아차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리곤 이내 무언가 남다른 변화를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가 치매를 앓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될테니까요. 그렇게 인간은 우리들의 기억이 또 다시 사라지게 될 것임을 자각합니다.

 

지금부터는 함께 힘을 모아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처음에 생각해 낸 방법은 역시 메모입니다. 매시간 대망각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는 메모장으로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메모장의 기록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행여 누군가가 메모장을 고의로 파손하거나 왜곡한다면 더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역시 인간의 위기극복능력은 대단합니다. 인간은 축적된 자신의 기억을 저마다의 메모리에 담아 몸속 메모리카드 슬롯에 장착을 합니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상용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이니 인간의 기억을 영구히 저장하는 것 또한 결코 불가능한 기술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주제의식은 바로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기억상실의 시대에서 과연 인간은 과학의 힘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이 간직하고 지속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십수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기억을 메모리카드에 저장하는 것은 이제 평범한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커다란 결함이 존재합니다. 언제든 자신의 메모리를 남의 것과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내 기억이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의 몸안에 장착될 수도 있습니다. 내 기억이 남의 몸에 저장되고 남의 기억이 내 몸안에 이식된다면.. 그 사람은 과연 나인가요? 타인인가요? 

복제인간이 따로 없습니다. 인간성상실의 폐해를 온몸으로 맞닥뜨려야만 합니다. 각종 범죄와 사회문제가 뒤따를 것임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메모리카드를 바꿔치기하여 대리시험을 치루며, 맘에 들지 않는 이의 기억을 훼손해 버리기도 합니다. 몸이 뒤바뀐 남녀, 자매, 가족들은 순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안에 매몰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남의 기억을 돈으로 거래하는 불법이 판을 칩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요. 특히, 죽은 사람과의 눈물겨운 재회는 결코 뿌리치기 쉽지 않은 유혹입니다. 선의로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평생동안 자신의 몸을 되찾지 못하는 영매(?)의 이야기는 양면성을 지닌 인간의 얄팍한 민낯을 경험하기에 아프기만 합니다. 계속해서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군요.   

소설은 마침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생'이라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았는데요.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는군요. '현상세계의 색이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혹에서 벗어나서 그 실상을 보고 집착을 버려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 

자신의 몸을 잃어버린 채 타인과 논쟁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일부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러나 마침내 실재와 환상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과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 제가 보고 느낀 것만을 실재하는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명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