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재능에 정말 필요한 것은?
친구가 용하다는 사주 선생님 이야기를 꺼냈다. 정작 본인은 크리스천이라 사주를 보지 않을 거지만,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용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니 나라로 보라고 거다. 지금에 와서는 자세한 내용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친구의 말에 의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 사람의 운명을 술술 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도 후기를 듣던 당시에 팔에 소름이 돋았었다. 평소에도 종종 사주를 보던 나는 당장 연락처를 받아 일정을 잡았다. 용한 사주가인 만큼, 역시나 예약이 가득 차 있었고,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겨우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신빙성을 더했다. 사주 선생님은 세 명 이상 모이면 고객이 원하는 장소로 출장 방문도 한다고 했다. 서둘러 멤버를 꾸렸고, 예약 날짜를 잡았다. 장소는 조용한 카페. 나는 세 명 중, 두 번째로 사주를 봤다. “호기심이 많고, 재주도 많다. 그런데... 끈기가 없다.” 소문 그대로였다. 이 선생님, 정말 용하다. 선생님은 그야말로 내 인생을 한 줄 평으로 요약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아이였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고, 학교 대표로 그림 대회에도 나가곤 했다. 크고 작은 상을 몇 번인가 탔으니, 재능이 아예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상을 받고 칭찬과 인정도 받으니, 우쭐했다. 그 둘 중 하나를 직업으로 삼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과 그림, 두 개 다 손에 쥘 수는 없는 법.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취미에 가까웠던 그림보다 글쓰기를 택했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단 어떤 분야든 작가가 되고 나면, 곧바로 인정받고 크게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나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내가 가진 재능에 대해서 확신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확신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내 재능은 내 원대한 꿈을 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점점 현실을 보게 되었다.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내가 가진 재능은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은 딱 ‘애매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고, 집안까지 좋았던, 그래서 교내에서 항상 인기인이었던 학급 반장이 어느 날 반 아이들에 대한 한 줄 소개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교실 뒤 환경미화 게시판에 걸린 그 문구를 나는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튀지도 숨지도 않는 아이.’ 반장이 나를 묘사한 그 문장을 보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글이 단단히 내 가슴에 박혔나보다. 딱히 튀지도, 그렇다고 없는 듯 숨지도 않는 그저 그런 보통의 아이. 나는 반장에게 딱 그런 아이였다. 아니,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내내 동급생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나는 그랬을 것이다. 수줍음이 많고 발표 울렁증이 있었던 나는 일어서서 발표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화르륵,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지다 못해 곧 터질 것 같은 얼굴이 창피해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곤 했다. 그래서 다들 나를 주목받기 싫어하고 소극적인 아이로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진짜 모습을 몰랐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동시에 앞에 나서고 싶은 마음도 강한 아이였다. 무대에 나서기에는 새가슴이 터질 것처럼 떨렸지만, 반대로 그 떨림이 짜릿했고 그래서 더 무대에 서고 싶었다. 나는 반장의 한 줄 평을 온몸으로 거부하듯 중학교에 가서는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변했다. 수업 시간이 지루해지면, 선생님의 말에 적절한 농담을 던져 반 아이들을 한바탕 뒤집어지게 만들었고, 선생님들이 내 끼를 보고 자리를 마련해주면 교탁 앞에 나가 춤과 노래를 선보이며 무대를 장악하기도 했다. 그렇게 중학교 3년 내내 나는 ‘웃긴 아이’, ‘재밌는 친구’, ‘학교의 스타’로 불렸고, 체육부장, 오락부장, 소풍 사회자, 축제 사회자를 놓치지 않았다. 6학년 때 반장도 나와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보란 듯이 나를 증명하기 바빴다. 나도 너만큼이나 인기인이자 특별한 사람,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정말 그랬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반장이 쓴 그 글을 여전히 내 인생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진 재능을 생각할 때, 종종 그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송곳처럼 주머니를 비집고 나올 정도로 남달리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은 수준의 애매한 능력. 애매한 재능을 가진 사람의 삶은 비극에 가깝다. 될 듯 말 듯, 계속되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이어지는 끝 없는 줄다리기. 포기하고 멀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가 끝내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천형과도 같은 삶. 나에게 글쓰기와 작가란 그런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주 선생님의 말이 이상하게 힘이 됐다. 나는 내가 가진 재능의 크기가 모자라서 멈춰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만 ‘끈기’의 문제였던가? 어차피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거라면, 이번 생은 작가로 살 수밖에 없다면 ‘끈기’만 가지면 될 일 아닌가? 누군가의 말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끈기 있게 쓰고 또 쓰다 보면 나도 뭐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애매한 재능을 가진, 작가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지금과는 다른 어떤 변화가 내 삶에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변화.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고 했다. 지금 나는 내 삶에 진저리가 난다. 하혈은 며칠째 이어지고, 주말 산부인과 진료를 기다리는 지금, 꼭 사형 선고를 앞둔 사람의 심정이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기회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법. 인생에서 멈춰서고, 글에서도 멀어진 지금. 나는 자궁근종으로 인해 죽음을 진지하게 대면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 당장 죽음이 내 삶에 닥친다면, 무엇이 가장 한이 될까를 생각해봤다. ‘글’ 결국, 글이었다. 지금까지 내 글을 열심히 쓰지 않은 것,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이 없는 것, ‘작가’가 아닌 ‘회사원’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 그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원통할 것이었다. 만약, 이번 주말 의사가 내게 남은 인생이 6개월 뿐이라고 선고한다면, 나는 가장 먼저 글을 쓰는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삶을 매일 쓰고, 발행할 것이다. 그러자 몇 년 전 작가 신청을 했다가 떨어진 ‘브런치’가 생각났다. 브런치라면 매일 글을 쓰고 발행하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블로그와 달리 내가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낼 가능성도 있었다. 당장 한글 파일을 켜고, 현재의 심정과 하혈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오랜만에 글을 쓰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무엇보다도 글로 쓰고 나니,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지금의 상황이 생각보다 무겁지 않게 여겨졌고, 덜 무서웠다. 글을 쓰다가 내가 쓴 글에 실실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래. 이래서 내가 글을 좋아했지... 그러자 어쩌면 나에게 갑작스레 닥친 이 위기가 그간 밥벌이에 급급해 잊고 있었던 글쓰기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나는, 이제야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글쓰기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