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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의 기억  

추운 겨울과 이제는 볼 수 없는 것을 기억하며...

by 손여름 Jan 03. 2025

노인의 행색은 한 눈에 봐도 남루했다.

추운 날씨에 잔뜩 움추린 탓에

작은 몸이 한층 더 작아 보였다.


햇빛에 검게 그을린 얼굴과

멀리서봐도 거칠어 보이는 거뭇한 손이

노인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마주 보이는 벤치에 앉았던 나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가방에 넣어 놓았던 책을 꺼내들었다.


다시 노인을 보게 된 것은

한 역무원이 노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서였다.


낡고 허름한 차림새에

노숙인이라고 생각해 쫓아내려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남자는 노인을 '엄마'라고 불렀다.



아들을 마주한 노인의 얼굴에

곧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젋은 남자는 그런 노인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 볼 뿐이었다.


아마도 노인은 아들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차로 어디론가 다녀오던 중에

잠깐 들른 것도같았다.


역무원 복장의 남자와 초라한 행색의 노인의 조합은

눈길을 끌었고,

나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두 사람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아들에게 바쁠테니 얼른 들어가 보라고 했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나는 순간 남자가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료들과 일하는 직장에 자신의 어머니가

한 눈에 봐도 초라한 행색으로

나타난다면, 반갑기보다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남자는 어서 빨리 엄마를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가 꺼낸 말을 의외였다.


남자는 노인에게 얼굴 표정만큼이나 무뚝뚝한 말투로

여기는 추우니, 같이 사무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노인은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지만,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남자는 노인에게 기차 시간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으니,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자고 다시 한번 말했다.


노인이 여전히 주춤거리자,

남자는 노인의 낡은 카트를 끌고 먼저 앞장섰다.


노인은 하는 수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남자의 뒤를 따랐다.


허리가 심하게 굽은 노인은 걸음이 불편해 보였다.

남자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기엔 무리였다.


나는 성큼성큼 걷는 남자를

노인이 놓칠까 노심초사하며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곧 멈춰섰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고는

그 자리에 서서 노인을 기다렸다.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남자를 따라잡으면,

남자는 다시 앞서 걸었고

잠시 후 멈춰서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모자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한참을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빠는 직업상 승용차가 아닌 용달차를 타고 다녔다.

아빠에게 용달차가 아닌 suv가 생긴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학창시절, 학교에 늦은 날이면

아빠가 종종 차로 태워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빠의 용달에서 내리는 나를

누군가 볼까봐 항상 마을을 졸였었다.


아빠에게 되도록이면 학교 앞이 아니라

좀 더 먼 곳에서 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대신 나는 뾰루퉁한 얼굴로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나는 남자도 나처럼,

행여 누가 보기 전에

그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달랐다.


노인의 초라한 행색과 굽은 허리가,

쩍쩍 갈라진 두 손이

자신을 먹이고 기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남자는 알았고,

쉽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서울로 취업 면접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마침 아빠에게 잘 다녀오는 길인지 전화가 왔었다.


아빠의 전화를 성가셔하던 나는

그날은 조금 길게 통화를 했던 것같다.


지금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됐다.


용산역에서 모자를 본 것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여전히 용산역에 가면,

늘 그때 모자의 모습과,

그 뒤에 걸려온 아빠의 전화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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