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회사 일이 엉망이다

거대 자궁근종을 임신했다. 

by 손여름 Dec 23. 2024

회사 일도 엉망이다. 매일 이어지는 하혈 속에서 건강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버거운데, 회사에서도 머리 아픈 문제가 터졌다. 타고난 문과형 인간이었던 나는 항상 숫자에 약했다. 고등학교 때도 문학과 국어, 사회, 영어는 성적이 제법 괜찮았지만 수학이 매번 발목을 잡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학과의 사이는 벌어졌고, 어느덧 나는 수학 시험지를 받자마자 찍고, 제일 먼저 책상에 엎드려 자는 ‘수포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숫자가 사회에 나와서도 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우리 회사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예산까지 알아서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에 약한 나는 연말까지 사용할 예산 사용 계산에서 오류를 냈고, 그 때문에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미 치른 행사에 당장 지급해야 할 강사료를 못 내보내게 생긴 것이다. 팀 회계 담당에게 전화했지만, 회사 회계팀에 전화해 보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산 중에 얼마간 묶어둔 예산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몇 번이고 해야 할 말을 종이에 적고, 몇 차례 연습을 한 끝에 겨우 전화를 걸었다. 그간의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묶여 있던 예산을 얼마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통 사정을 해본다. 그러나 한참 이어진 내 하소연 끝에 돌아오는 답변은 일단 알았으니 끊으라는 말뿐. 나는 며칠 동안 이 문제로 전전긍긍하며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혼자 고민하고 끙끙 앓던 끝에 회계팀에 겨우 전화를 했더니, 바쁘다고 내일 다시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기다렸다가 어렵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다시 전화를 하면서도 전화를 할 적당한 타이밍을 또 얼마나 고민했던가. 출근하자마자 이런 머리 아픈 문제로 전화를 하는 것은 민폐라는 생각에 오전은 되도록 피했다. 시시각각 타들어 가는 조급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인내를 발휘했다. 오후 시간에도 점심을 먹은 후 식곤증이 몰려오는 1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에 보류, 적당히 여유가 생길 2시가 되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어렵게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그런데... 그런데! 끊으라니!!! 일단 알았으니 끊으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허망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다시 고민을 시작한다. 전화를 다시 걸어서 그럼, 언제 다시 전화를 해도 되는 것인지 물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이 전화를 걸어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나는 발 등에 불이 떨어져서 급해 죽겠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일단 끊으라’에서 과연 ‘일단’이란 또 대체 언제까지이고, 무엇까지인가? 아... 도무지 모르겠다.


혼자서 '알았으니 일단 끊으라'는 마지막 말을 붙잡고 해석을 해보지만 헛갈린다. 내 구구절절한 사정은 잘 들었으니 이제 넓은 아량으로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다방면으로 찾아보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댁의 사정이야 어찌 됐든 안 되는 것은 안 되니, 쓸데없는 하소연일랑 그만 집어치우고 당장 썩 꺼지라는 말인가?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 것일까? 나는 회계 담당자의 마지막 말이 어디에 더 가까운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본다. 그러나 얼굴 한번 대면한 적 없는 다른 팀 직원과의 2분 남짓한 짧은 통화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전화로 나눈 짧은 대화는 그마저도 거의 구구절절한 나의 사정과 이곳으로 이직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업무 미숙으로 인한 실수라는 변명이 담긴 일방적인 호소에 가까웠다. 상대는 간간이 희미하지만 그렇다고 또 안 들릴 수가 없는 크기로 한숨을 내쉬며, ‘네, 그런데요. 그래서요.’ 한 것이 전부였다. 벌써 12월도 한 주가 다 지나가는 시점. 올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는 기한이 촉박하니 마음은 더 조급하다. 오후 5시 쯤에 다시 전화를 해서 또 한번 사정을 해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 주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적절한 타이밍일까... 아니면 팀장님께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실직고하고 도움을 청할 것인가...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굴려보지만, 딱히 그렇다 할 해결책이 튀어나올 리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렇지 않아도 탈모로 부족한 머리털을 잡아 뜯으며 한숨을 쉬어대는 것뿐이다. 이 상황에서 본사가 아닌 외부에서 혼자 근무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간신히 구색만 갖춘 낮은 파티션 사이로 촘촘하게 모여있는 본사 사무실에서는 지금의 이 좌절마저도 자유롭지 못 할 것이었다. 혼자 분점에서 일을 하며 시설 관리, 시설 수리, 행정 처리, 관람객 응대, 전시 대본 작성, 행사 진행 등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까지 셀프로 쳐야 했던 상황. 혼자여서 외롭고 고되고 서럽고 벅차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육성으로 뱉어낼 수 있고, 내 머리지만 맘껏 쥐어뜯으며 몸부림 칠 수 있는 이 환경이 오늘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머리를 쥐어뜯으면 뜯을수록 지금 당장 중병을 선고받을 수 있는 상황, 내 코가 석자인데, 회사 일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밀려든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깟 회사 일이 뭐라고... 분노가 솟구친다. 그러나... 원흉을 찾아 헤매던 분노가 향한 곳은 결국 지지리 숫자에 약해서 예산에 빵꾸나 내고, 제 몸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피를 철철 쏟아 내고 있는, 지극히 무식한, 무식해서 용감한 한 인간에게 다다른다. 그래. 누구를 탓하겠는가. 다 내탓인 것을... 진짜... 나는 이런 내 자신이 진저리가 난다. 

작가의 이전글 비련의 여주인공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