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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Jun 19. 2024

Vol.25 <피그말리온의 변명>

기록보관소

사서 김지은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상대로 조각한 여인상을 사랑했던 그리스 신화 속 인물입니다.

대상만이 존재하는 사랑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조각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지요.


피그말리온의 이러한 사랑은 현대인의 덕질과 비교되곤 합니다.

실존하지 않는 혹은 닿지 못할 대상을 향한 절대적이고 열정적인 덕후의 사랑은

어쩌면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덕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편견이 존재합니다. 

덕후의 사랑은 정상성의 범위를 벗어난 일방향의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계속하며, 사랑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인간의 점점 커져가는 사랑 이야기를

<피그말리온의 변명>에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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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상에 몰입하다 끝내 사랑에 빠지는 일은 먼 옛날부터 이어져 왔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빈 조각을 찾기 위해 헤맨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은 당시 여인들의 문란함에 염증을 느끼고 조각에 몰두한 예술가였다. 그는 노력 끝에 가장 이상형에 가깝고 아름다운 여인상을 만들었다. 자신이 만든 정교함과 생동감에 빠진 피그말리온은 마침내 여인상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여인상을 사랑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여인상을 알뜰히 챙겼다. 상아로 만든 조각상은 분명 무척이나 차가웠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현대인 의덕질과 비교한다. 실존하지 않는 혹은 닿지 못할 대상을 향한 절대적이고 열정적인 덕후의 사랑. 그것이 어쩌면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감정이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농담이다. 덕후를 만드는 유전자가 있다면 그 조상은 피그말리온이 아니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할 존재를 찾아내고야 마는 이 능력이 사실은 우리의 DNA에 각인된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덕질하는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동경, 연모, 짝사랑 등 온갖 단어를 갖다 붙여도 미 묘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단지 그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조건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성스러운 사랑. 그러나 분명 우리 욕망의 밑바닥에서 기인한 추악한 사랑. 도무지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 사랑이 우리를 움직인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허전한 일상을 채운다. 웃다가 울다가 또다시 웃게 한다. 덕후의 사랑은 괴상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은 양면적인 법. 이 집요하고도 순수한, 욕망적이면서도 희생적인 감정이야말로 사랑을 설명하기에 제격이지 않은가? 본래 사랑은 추하고도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덕후들의 사랑도 다른 사랑들과 마찬가지로 어둑하고 눈부실 뿐. 


왜 유독 어떤 사람들은 덕질에 진심일까? 왜 그들은 최애*라는 헤어나올 수 없는 망망대해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안방의 작은 브라운관으로 처음 만난 나의 첫 최애는 빛나는 금발 머리의 미소년이었다.그는 판타지 애니메이션 속 멸망한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로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드넓은 세상을 떠도는 외톨이였다. 소년의 외로움과 분노는 뭇 사춘기 청소년의 감성을 저격하기에 충분했다. 그 애니메이션은 특유의 잔혹한 연출로 늦은 시간에 방영하고는 했다. 늦게까지 혼자 남겨진 밤, 또는 저녁 밥상에서 시작된 부모님의 싸움으로부터 도망치기에 충분한 자극이었다. 금발 미소년과 자신의 고독을 동일시하던 나는 무럭무럭 자라 또 다른 최애를 찾아 떠났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군무를 선보이는 아이돌 그룹 또한 부족한 애정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인디 영화에서 활약한 모 영국 배우는 오랫동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아직도 나는 그의 작품을 찾아본다. 나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이라는 드넓은 바다를 유랑하며 많은 덕후 동지를 만났다. 팬덤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덕후들은 모든 사랑을, 즉 자본과 시간과 애정을 바쳤다. 우리에게 덕질은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였다. 기나긴 덕질 연대기를 건너며 만나왔던 덕후들은 하나같이 자조적인 말을 내뱉고는 했다. 왜 우리는 갓반인**이 될 수 없을까? 그렇게 한탄하면서도 그들은 절대 덕질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덕질이야말로 우리 안의 빈칸을 채워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 창작물 또는 아이돌 그룹 등 덕질의 대상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를 뜻하는 말. 

** 덕질을 하지 않고 현실의 인생에 충실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 갓(God)과 일반인의 합성어. 



덕질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게 한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 대상을 중심으로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 나이, 성별, 학벌, 전공, 직업과 같은 요소는 팬덤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공동체가 없는 사람들이 모였기에 우리의 세상은 더욱 확장된다. 하나의 커뮤니티 아래에 모인 그들은 각자 가진 정보와 애정을 공유한다. 그 형태는 무궁무진하다. 글, 그림, 사진, 춤 등 그들의 사랑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덕후들은 한 대상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면서 창작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창작의 대가로 소통을 얻는다. 덕질이라는 이름의 위안과 열정을 나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진정 원하는, 공허한 일상을 채워 우리를 완성하는 조각이다. 우리는 사랑을 표현한 대가로 사랑을 얻는 것이다. 여느 창작자와 다르지 않게 덕후들도 그 생산물에서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표현한다. 소비자들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생산자의 가치관을 흡수하여 2차 창작물을 만든다. 덕후들의 세계는 거미줄처럼 뻗고 뻗으며 나아간다. 그 거미줄은 대상의 본질을 정확히 뚫어 보기도 하고, 원작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은 조각난 일상을 연결하는 즐거움이다. 


최근 들어 덕질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덕후를 향한 사회적인 편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나이나 성별과 같은 요소로 취향을 섣불리 판단하고 재단하는 말은 듣는 당사자에게는 모욕이 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왜 어떤 사랑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왜 누군가의 사랑은 감추어야 할 치욕이 되는가? 비단 덕질에만 해당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랑하는 일에도 너무나도 많은 제약과 차별이 따르니까. 우리의 사랑은 분명히 여기에 존재한다. 모든 사랑은 양면성을 지닌다.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이라도 욕망과 다툼, 증오와 같은 부정적인 이면이 존재한다. 결국 사랑은 아름다운 동시에 추악하기 마련이다. 덕후의 사랑도 평범한 사랑이기에 부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상성이라는 범위에서 한발 벗어난 것만으로 구경거리가 된다. 그런 시선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덕질한다. 사랑의 범위가 조금씩이나마 확장되고 있다는 작은 희망 아래에서 숨을 쉰다.


피그말리온의 지극정성에 감복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인간이 된 여인상은 피그말리온과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된다.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 여인상이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피그말리온은 그저 미치광이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덕질을 이어가는 우리의 결말은 어떻게 남게 될 것인가? 조금 말을 바꿔 다시 질문한다. 인간의 사랑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을 것인가? 



Vol.25 <피그말리온의 변명> 中

Editor 김윤희

Illustrator 장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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