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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역설 13화

내 안의 적

by 은파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언니에게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새 문서를 열어둔 채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만 반복했다. ‘언니, 편지 잘 받았어’라는 문장은 너무 형식적으로 느껴졌고, ‘언니, 정말 충격적이었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들렸다. 말은 머릿속을 빙빙 돌았지만, 손끝으로는 옮겨지지 않았다.

결국 가장 솔직한 마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언니, 편지를 읽고 며칠째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었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라고 적어 보았지만, 그다음 문장에서 다시 막혔다. 언니의 고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이해한다고 말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나 역시 힘들었다고 털어놔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어머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머니도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15년 동안 대학 등록금을 모아 왔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여전히 후회하며 살아오셨다는 고백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이야기들을 언니에게 전하면 언니가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가족이 언니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언니의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지 궁금했다.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다시 타자를 시작했다. ‘엄마를 만났어. 엄마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셔. 그때 언니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야 안다고 하시더라’고 적었지만, 곧 손이 멈췄다. 문장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중재자인 척하는 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문장을 지우고 새로운 문장을 써보았다.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복잡한 마음이었어. 언니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게, 특히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미안했어’라고 적어 보았지만,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나 자신을 피해자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다시 지우고 다른 방식으로 써보았다. ‘언니 편지를 읽으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어. 그때 일들이 그렇게 복잡했다는 걸 전혀 몰랐어’라고 적었지만, 이것 역시 책임을 회피하는 말처럼 들렸다. 몰랐다는 말이 면죄부처럼 느껴졌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언니의 아픔에 공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나 역시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하고 있었다. 언니가 나를 미워했다는 고백 앞에서도 ‘내가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하려 하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닫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런 방식으로 답장을 쓰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의 용기 있는 고백에 진정으로 응답하려면 먼저 나부터 솔직해져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 스스로 묻게 되었다.

언니는 15년 동안 숨겨 왔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자신에 대한 미움과 질투와 원망, 그리고 동시에 존재했던 사랑까지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 복잡하고도 추한 감정과 아름다운 감정을 함께 꺼내 보였다. 반면 나는 무엇을 드러내며 살아왔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나의 선택은 언제나 모범을 향해 있었다. 언니가 사라진 후 부모님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제아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착한 딸이 되겠다고 결심했고 부모님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두려움에 의해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언니처럼 미움받고 싶지 않았고, 언니처럼 버림받고 싶지 않았고, 언니처럼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착한 아이가 되기로 했었다. 그것은 부모님을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한 방어였다.

그 깨달음이 밀려오자 갑자기 숨이 막혔다. 지금까지 믿어온 나의 모습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는 자의식, 배려심 있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이미지, 상처를 받아도 꿋꿋이 이겨낸 사람이라는 서사가 모두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일요일 오후의 풍경이 창틀 너머로 번져 보였다. 사람들이 산책하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내 안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지진이 난 듯 마음의 지층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언니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너를 미워하게 됐어’라는 문장에서 또다시 멈추었다. 언니가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내가 그런 미움을 받을 만한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더 이상 답장을 쓰지 못했다. 언니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내가 누구였는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문장도 진실에 닿지 못한다고 느꼈다.

며칠 동안은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다. 특별한 것 없는 하루들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강연 준비를 하다가도, 사람들과 미팅하다가도 문득문득 그 생각이 떠 올랐다. 나는 과연, 정말 피해자였을까. 모든 관계에서, 모든 상황에서 늘 당하는 쪽이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도윤이었다. 그와 헤어진 지 몇 달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억울한 감정이 가장 먼저 앞섰다. 나는 정말 이해심 많은 여자 친구였다고 믿었다. 그가 바쁘다고 하면 이해해 줬고, 피곤하다고 하면 배려해 줬으며, 다른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질투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도 결국 나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때의 내 이해심이나 배려가 과연 진심이었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도윤이 바쁘다고 했을 때, 나는 정말로 그를 이해한 걸까. 아니면 ‘완벽한 여자 친구’로 보이고 싶어서 이해하는 척을 했던 건 아닐까. 사실은 서운하고 외로웠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도윤에게 진심을 제대로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괜찮아”라고 말했고, 서운한 일이 있어도 “이해해”라고 했으며, 화가 나는 순간에도 “상관없어”라고 넘겼다. 그런 관계가 진짜 사랑일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은 감정을 숨기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침묵을 당연하게 여긴 채 흘려보낸 관계가 과연 사랑이었을까. 도윤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향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감정을 나누지 못한 관계에서는, 결국 친밀감이 자라날 수 없으니까.

그런데도 도윤을 원망했다. 그는 배신자였고, 나는 피해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관계가 그토록 공허했던 데에는, 분명 내 책임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감정을 숨긴 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갈등을 회피하면서도 마음의 거리를 좁히길 원했다. 그런 내 모순을 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민준의 경우는 더 복잡했다. 그의 죽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다. 죄책감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잘해줬더라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죄책감 뒤에 감춰져 있던 진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민준은 “요즘 좀 힘들어”라고 말했었다. 나는 짧게 “힘내”라고 답했다. 왜 더 묻지 않았을까. 정말로 시간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혹시 그 고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나의 평온한 일상이 흔들리는 것이 싫어서였던 건 아닐까.

돌이켜보면, 민준과 나의 우정도 그렇게 깊지 않았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라고 말했지만, 서로의 속마음을 진지하게 나눈 적은 드물었다. 만나면 안전한 주제들만 이야기했고, 각자의 문제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서 그가 갑자기 “힘들다”고 말했을 때, 나는 당황했던 것 같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장 무난한 답을 골랐던 것 같다. 진심에서 우러난 걱정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을 넘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에는, 나의 무관심을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버렸다.

은채와의 관계도 그리 건강하진 않았다. 나는 그녀를 가장 가까운 친구라 믿었지만, 정작 내 진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리상담사인 은채라면 충분히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내 어두운 면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은채 앞에서도 완벽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없는 사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의 이미지로 남고 싶었다. 은채에게 분석 당하는 것도 싫었고,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늘 표면적인 대화만 나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만, 내가 피했다.

그런 관계를 과연 ‘우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숨기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는 관계. 진짜 친밀감이란, 그런 얇은 층위의 관계 속에서는 자라나기 어렵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해 왔다. 진짜 감정을 숨기고, 상대가 원하는 모습대로 행동하며, 갈등을 피하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건강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쪽이 계속 참기만 하고 양보만 하는 관계에서는 진짜 소통이 불가능하다. 결국 그 관계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오직 상대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문득 언니와의 관계도 떠올랐다. 언니가 나를 미워했다고 말했을 때,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언니에게 미움을 살 만한 행동을 해본 적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동생이었고, 문제는 늘 언니 쪽에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내가 ‘착한 동생’이었던 것이 오히려 언니에게는 압박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착할수록 언니는 상대적으로 더 나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고, 내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수록 언니는 더 쉽게 문제아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가능성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늘 선량한 피해자였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들이었다. 그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단순하고 이기적인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관계는 언제나 쌍방의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누군가만 일방적인 피해자이고, 누군가만 가해자인 관계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상처받고, 또 서로를 통해 회복된다. 나는 그 당연한 사실조차 외면한 채, 내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끝까지 피해자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비겁한 사람이었는지를.

그날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오래된 일기장들을 꺼냈다. 대학 시절부터 몇 개월 전까지 꾸준히 써온 기록들이었다. 그때는 나름대로 솔직한 마음을 적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내 손으로 쓴 글을 통해, 얼마나 교묘하게 나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는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썼던 일기 한 장이 유난히 소름 끼쳤다.

“오늘 과 친구들과 술을 마셨는데, 모두 나를 착하다고 했다. 남자 친구 문제로 고민이 많다는 선미에게 계속 조언해 줬더니 정말 고마워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고민 상담을 자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니까.”

그 아래에는 이런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사실 선미 이야기 들으면서 좀 지겨웠다. 맨날 똑같은 고민이고, 조언해도 안 듣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래도 싫은 내색은 안 했다.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잃기 싫어서.”

이미 그때부터 내 진짜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선미에게 진심으로 도움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착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조언하는 척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문장에서는 다시 자기합리화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내가 들어줘서 선미가 조금이라도 위로받았다면 의미 있는 일이지······”

이런 식의 패턴은 일기 곳곳에 반복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진짜 감정을 인정하지만, 곧이어 그것을 선한 의도로 포장하고 마는 것. 내 안의 이기심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결국 ‘좋은 결과’를 근거로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 마치 내 안에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 같았다. 하나는 진실을 보는 사람, 또 하나는 그 진실을 애써 가리려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취업 준비 시절의 일기에서는 그 모습이 더 노골적이었다.

“면접에서 봉사활동 경험에 관해 물어봤다. 고등학교 때 양로원에서 했던 봉사 이야기를 했더니 면접관들이 좋게 본 것 같다. 사실 그때 봉사는 대학 진학을 위한 스펙 쌓기였는데,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르신들과 진심으로 교감했다고 말했더니 감동한 것 같았다.”

그 아래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면접 끝나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모든 지원자가 다 그렇게 하는 거잖아? 나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지.”

결국 여기서도 결론은 자기합리화였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회피했고, 그러면서도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시간이 지나 직장인이 된 이후의 일기에서는 그 자기기만이 더욱 정교해져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예 내 감정을 인식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 상사가 야근을 시켰다. 불만 한마디 없이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다른 동료들은 불쾌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해심 있는 직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의 일기에서는 이상하게도 스트레스와 피로에 관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었다.

‘요즘 왜 이렇게 피곤할까?’

‘이유 없이 우울하다.’

‘뭔가 공허한 기분이 든다.’

그때는 그런 감정의 원인을 몰랐지만, 지금 보니 너무도 명확했다. 나는 내 진짜 감정을 억압했고, 부인했고, 그 결과로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강연을 시작한 이후의 일기들이었다.

“첫 강연이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감동한 모습을 보니 정말 뿌듯했다. 내가 힘든 시간을 견뎌냈고, 그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하지만 몇 장 뒤의 일기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쓰여 있었다.

“강연 준비를 하면서 내 과거를 포장하는 게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실제로는 아직 다 극복하지도 못했는데, 완전히 이겨낸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청중은 모르니까 상관없겠지.”

그리고 바로 다음 줄에는 또다시 변명이 이어졌다.

“그래도 사람들이 희망을 얻는다면, 작은 과장은 괜찮지 않을까.”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얼마나 정교하게 나 자신을 속여왔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조차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일기장을 덮은 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게 바로 나였다.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기적이고, 이해심 많은 척하면서도 내 이미지에만 집착하며, 진심으로 돕는 척하면서 사실은 나의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

가장 무서운 건, 이런 자기기만이 이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진짜 감정이 떠오르는 순간, 자동으로 그것을 덮을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낸다. 마치 반사신경처럼 작동하는 자기방어 시스템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제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감정이 포장되고, 모든 생각이 검열되며, 모든 행동이 계산된 이 삶 속에서, 과연 진짜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예정된 강연을 준비하며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오늘의 주제는 ‘진정한 행복 찾기’였다. 평소처럼 노트북을 열고 슬라이드를 하나씩 검토하다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파워포인트 첫 화면에는 큼지막하게 ‘행복 전문가 이현’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그리고 프로필 항목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은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다.’

행복을 찾았다고? 내가? 불과 몇 시간 전, 일기장 속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오히려 정반대의 진실이었다. 나는 공허하고 가짜로 살아왔고, 무엇 하나 진심으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고 사람들 앞에 서려 하고 있었다. 마치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수영 강사를 자처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슬라이드를 넘기며 강연 내용을 점검했지만, 확인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나는 평생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억압하고, 감췄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진정한 관계는 서로에게 진실할 때 비로소 만들어집니다.’

나는 단 한 사람에게도 내 진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모두가 기대하는 역할만 연기해 왔다.

그리고 가장 위선적으로 느껴졌던 문장은 이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 자신의 단점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나는 한 번도 내 단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단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포장’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나는 날마다 나를 부정해 왔다.

출판사에서 요청한 두 번째 책 기획안도 다르지 않았다.

『더 깊어진 행복 철학』

『진정한 자아 찾기』

그런 제목들이 오갔다. 내가 그런 책을 쓸 자격이 있을까? 진정한 자아는커녕, 나는 가짜 자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행복 철학은커녕, 내 불행조차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

문득, 내가 만들어낸 괴물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 전문가 이현’이라는 캐릭터가 나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이제는 그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고, 연기를 해야 하고, 가짜로 살아야 했다. 가장 무서운 건, 사람들이 그 가짜를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진짜 고민, 진짜 아픔보다는 예쁘게 포장된 해답과 밝은 메시지를 원했고, 복잡한 진실보다는 단순한 해결책을 원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욕구를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똑같이, 정확하게 공급해 왔다. 이제 와서 나는, 그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해왔을 뿐이라고, 나 역시 피해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건 또 다른 변명일 뿐이다.

나는 선택했다. 가짜가 되기로. 내 의지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그렇다면 오늘 강연은 어떻게 해야 할까. 또다시 무대에 올라 가짜 미소를 짓고, 가짜 자신감을 내보이며, 가짜 조언을 늘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고백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까.

강연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기대에 찬 표정들, 메모할 준비를 마친 손들, 그리고 ‘행복 전문가’를 보기 위해 반짝이는 눈빛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모든 시선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분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바라봤다. 겉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 거울 속 사람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낯설 정도로 평온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기에 더 그랬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마지막으로 강연 원고를 빠르게 훑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행복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예전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나왔을 문장인데, 오늘따라 도무지 입에 붙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너무 많은 기대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대에 오르자 따뜻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평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입에서는 익숙한 인사말이 나왔지만,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거짓말이야.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도,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 모습도, 곧 하게 될 이야기들도, 모두 다 가짜야.’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도 몸은 익숙한 방식대로 반응했다. 손짓도, 표정도, 목소리의 톤도, 마치 연극처럼 완벽하게 굴러갔다.

"오늘은 특별히 솔직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순간, 원고에 없던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청중들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 그들은 아마 평소보다 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솔직해질 수 있을까.

"사실······ 사실 저도 여러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며 오늘도 괜찮은 하루가 되길 바란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다짐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가짜로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여왔는지, 그 모든 것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안전한 말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장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강연은 평소와 비슷하게 마무리되었다. 다소 솔직한 톤이긴 했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만족했고, 박수도 여느 때처럼 컸으며, 질의응답 시간에는 감사 인사까지 이어졌다. 모든 것은 매끄럽고 완벽해 보였다.

강연을 마치고 분장실로 돌아와 혼자 앉았을 때, 문득 언니의 편지가 떠올랐다. 언니는 15년 동안 숨겨왔던 모든 것을 그 편지에 담아 고백했다. 미워했던 마음, 질투했던 감정, 도망쳤던 이유까지. 그 모든 아픈 진실들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그런데 나는 한 시간 넘게 무대 위에 서 있었으면서도 단 하나의 진실조차 말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을 들어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손을 멈췄다. 아직 답장을 보낼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의 용기 있는 고백에 응답하려면, 나도 먼저 솔직해져야만 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새 공책 하나를 샀다. 오래된 일기장들은 이미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처음부터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솔직해지고 싶었다. 자기합리화도, 포장도, 변명도 없이.

집에 도착해 공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무엇부터 써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가장 쓰기 어려운 고백부터 적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지금까지 거짓으로 살아왔다. 좋은 사람인 척, 행복한 사람인 척, 성공한 사람인 척해 왔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손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써 내려갔다.

‘나는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람이다.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진짜 사랑을 주지 않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진짜 나를 보여주지 않았다. 모든 관계 속에서 피해자인 척했지만, 사실은 나도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났다. 슬픔보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드디어 진실을 마주했다는 안도감.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물론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인정하는 것과 바뀌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만하고 싶다. 더 이상 가짜로 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싶지 않다. 비록 지금의 나는 초라하고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다시 시작하고 싶다.’

공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당장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이상 나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언니에게 답장을 쓸 때가 되면, 이제는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그냥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언니 앞에 서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관계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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