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와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책에 대한 논의를 위한 자리였다. 어젯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낸 탓인지 이런 자리가 유난히 버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당장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강남역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김 대리는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현 작가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신 기분이 어떠세요?”
예전 같았으면 겸손한 미소와 함께 적당한 덕담을 건넸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은 말이 어색하게 맴돌았다. 결국 나는 “아, 네······ 감사한 일이죠”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정말 감사한지 조차 모르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 안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김 대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번에 저희가 생각한 두 번째 책의 방향은요, ‘더 깊어진 행복론’이에요. 첫 번째 책이 입문서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마치 고급 과정처럼요. ‘진정한 자아 찾기’, ‘깊은 내면과의 만남’ 같은 주제로요. 독자들이 작가님의 철학을 정말 궁금해하고 계시거든요.”
철학이라니. 어제까지도 내가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 말이 너무 아이러니하게 들렸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좀 더 생각해 볼게요.”
“그럼요, 충분히 고민해 보세요. 그런데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어요.”
김 대리는 더욱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음 주에 방송국에서 토크쇼 출연 제안이 들어왔어요. ‘성공한 여성들의 비밀’이라는 콘셉트인데, 어떠세요?”
예전 같았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자리였지만, 지금은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낯설고 버거운 제안이었다. 무슨 성공의 비밀을 말하라는 걸까. 나에게는 비밀이라 할 만한 성공보다, 실패와 자기기만의 역사만 남아 있을 뿐인데······
미팅을 마치고 카페를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던 터라, 카페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비가 정말 많이 오네요. 우산 안 가져오셨어요?”
“네, 오늘은 깜빡했네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금방 그칠 기세는 아니었다.
“저것 좀 보세요.”
그 남성이 길 건너를 가리켰다. 하이힐을 신은 한 여성이 깊은 물웅덩이에 발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들고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고,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어버렸다.
“하하하.”
나는 평소에 남의 불편한 상황을 보고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예의상 참아야 한다고 배워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중년 남성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저 아가씨, 정말 곤란하시겠네요. 그런데 또 웃기긴 하네요.”
우리는 나란히 서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 역시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웃다가 뒤로 물러서는데, 비에 젖은 고무 매트에 발이 미끄러졌다.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털썩 주저앉았고, 옷은 흠뻑 젖고, 가방은 바닥에 떨어졌으며, 머리카락은 흩어졌다.
“아이고, 괜찮으세요?”
남성이 깜짝 놀라 나를 부축하려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일어나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더 웃기네요. 남을 보고 웃다가 제가 넘어지다니.”
정말 우스웠다. 예전 같았으면 얼마나 당황하고 주위를 의식했을까. 하지만 어젯밤, 완벽한 이미지를 내려놓기로 했던 나는 지금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냥, 웃겼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둘 다 참 재미있네요.”
그 남성도 나와 함께 웃었다. 그때였다. 길 건너편에서 허우적거리던 여성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손을 흔들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우리와 함께 웃는 눈빛을 보냈다. 민망할 만도 한데, 그녀의 유쾌한 반응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마치 ‘우리 모두 바보 같은 순간이네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젖은 옷도, 흩어진 머리카락도, 더러워진 가방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가 택시 불러드릴게요.”
남성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고맙긴 한데, 선생님도 우산 없으시잖아요.”
내가 대답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집이 근처예요. 그런데 아가씨는 감기 걸리겠어요, 이렇게 젖으시면.”
택시에 올라 백미러로 내 모습을 바라봤다. 화장은 번지고, 머리는 엉망이고, 옷은 구겨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은 밝았다. 애써 밝게 보이려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정작 그렇게 애쓸 때의 내 얼굴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망가진 모습이 오히려 진짜 같았다. 기사님도 거울로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
“아가씨,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비 맞고도 이렇게 웃으시는 거 처음 봐요.”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으며, 다시 웃음이 났다. 물웅덩이에 빠진 여성, 그 옆에서 함께 웃던 중년 남성,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나.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순간들은 모두 진짜였다.
사흘 뒤, 뜻밖의 전화 한 통이 모든 균형을 무너뜨렸다. 도윤이었다. 몇 달 만의 연락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자신만만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떨리는 어조였다. 만나서 꼭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우리는 한강 공원에서 보기로 했다. 도착하니, 그는 이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평소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와줘서 정말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 말마저 기운 없이 들렸고, 그의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모습을 보고 먼저 걱정했겠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동정도, 미안함도, 그리움도 없었다. 그냥 오래전에 알던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마주친 것 같은 느낌뿐이었다. 나는 담담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사실…… 그 여자랑 헤어졌어. 그리고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겼어. 그 일로 소문이 나서, 지금 정말 힘든 상황이야.”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도 괜찮아질 거야”, “힘내” 같은 말을 건넸겠지만, 이번엔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런데 도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한테…… 정말 미안해. 그땐 내가 정말 바보였어. 너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지금 와서 보니까,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알겠어.”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날것 그대로의 분노였다.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지금 와서야?’
‘모든 게 망가지고 나서야?’
그동안 꾹 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 목소리는 떨렸고, 그 떨림은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 같은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
도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로 생각했겠지.”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 쪽을 힐끔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속 안에 갇혀 있던 모든 것이 터져 나왔다.
“너는 편했겠지. 아무 말 안 하는 여자 친구, 문제 삼지 않는 여자 친구, 그냥 웃어주기만 하는 여자 친구. 그게 사랑이었어? 그게 좋은 관계였다고 생각한 거야?”
“이현아, 진정해…….”
“진정하라고? 나한테 진정하라고? 나는 15년 동안 진정하면서 살았어. 언니가 떠났을 때도 진정했고, 민준이가 죽었을 때도 진정했고, 네가 바람피웠을 때도 진정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도윤은 점점 당황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지켜보는 것을 의식하는 눈치였다.
“부끄러워?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부끄러워? 그럼, 애초에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너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그가 중얼거렸다.
“맞아, 이제는 다른 사람이야. 아니, 원래부터 다른 사람이었어. 그동안은 가짜였던 거야. 너는 그 가짜였던 나를 사랑한 거야. 진짜 나를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소중하다는 말을 해?”
“그럼…… 그럼, 진짜 너는 어떤 사람인데?”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네가 알던 그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은 아니야. 그건 확실해.”
한동안 도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말에 또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이번엔 슬픔이었다. 그런데 이 슬픔은 예전처럼 자기연민이 섞인 슬픔이 아니었다. 진짜 관계를 맺어 본 적 없다는 데에서 오는 슬픔, 서로를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었다는 상실감이었다.
“안 돼.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된 관계였어. 너는 가짜 나를 좋아했고, 나도 가짜 너를 좋아했어. 이제 와서 진짜를 찾기엔 너무 늦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너를 진짜 사랑했던 건 아닌 것 같아.”
그 말을 하고 나자,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너와 사귀는 건 편했어. 안전했고, 복잡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게 과연 사랑이었을까?”
도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뭐였던 거야?”
“연습이었지. 진짜 관계를 위한 연습. 비록 실패한 연습이었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분노도, 슬픔도, 모두 다 쏟아낸 것 같았다. 이상하리만치 후련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달랐다. 억울해서도, 후회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흘러나온 눈물이었다. 슬프면서도 시원했고,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후련했다. ‘진짜 감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깔끔하지 않고, 정리되지도 않고, 복잡하고 모순이 가득했지만 적어도 진짜였다는 확신······ 가짜 평온보다는 진짜 혼란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다음 날, 은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엔 용기를 냈다. 이번엔 정말로, 진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더는 표면적인 대화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은채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평소엔 늘 그녀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으니까.
“이현아,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좀 다른데?”
역시 심리상담사답게, 미묘한 변화도 금세 알아차렸다.
“만날 수 있어? 할 얘기가 있어.”
평소 같았으면 ‘시간 괜찮으면’이라든지, ‘바쁘지 않으면’ 같은 말로 돌렸겠지만, 이번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언제? 지금 당장도 괜찮아.”
다음 날 오후, 홍대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서 만났다. 은채는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눈빛은 어딘가 탐색적이었다. 전문가로서의 본능일지도 몰랐다.
“요즘 어때? 뭔가 달라 보여.”
그녀가 커피잔을 들며 물었다.
“응, 많이 달라졌어.”
예전 같았으면 ‘별로 다를 게 없는데’라고 넘겼겠지만, 이번엔 솔직히 인정했다.
“사실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많았어.”
내 말에 은채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졌다.
“어떤 것들?”
“거의 모든 것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정면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우리가 친구가 된 지 몇 년이나 됐는데, 나는 한 번도 진짜 고민을 너한테 털어놓은 적이 없었어. 너는 아마 내가 늘 괜찮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렇지 않은 거야?”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어. 오히려 괜찮은 척하느라 더 괜찮지 않았어.”
말하는 순간 목이 메었다.
“나는…… 정말 가짜로 살아왔어. 너한테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심지어 나 자신한테도.”
은채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완전히 상담사 모드에 들어간 듯 보였다.
“자세히 말해줄래?”
그래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언니와의 관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피해자 역할에 안주했던 지난 시간, 도윤과의 가짜 연애, 민준의 죽음 앞에서조차 느꼈던 무감각, 그리고 ‘행복 전문가’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허상까지.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긴 고백이었지만, 은채는 단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줬다.
“그래서…… 너한테 미안해.”
고백의 마지막에, 조용히 말했다.
“친구라고 하면서 진짜 나를 보여준 적이 없어서. 너는 나를 위해 시간도 내주고, 조언도 해줬는데, 나는 늘 가면만 쓰고 있었어.”
은채는 아무 말이 없었다. 표정조차 읽기 어려웠다. 화가 난 걸까, 실망했을까, 아니면 상담사로서 적절한 반응을 찾고 있었던 걸까. 그 침묵이 무거워질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현아.”
“응?”
“나도 미안해.”
“뭐가?”
“나도 눈치챘었어. 네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거. 네가 진짜 마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거.”
은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상담사니까 알 수 있거든. 어떤 사람이 진짜 이야기를 하는 건지, 포장된 말을 꺼내고 있는 건지.”
“그럼, 왜 안 물어봤어?”
“무서웠어.”
그녀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솔직했다.
“너와의 관계가 깨질까 봐. 네가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래서 그냥…… 그냥 네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아팠다. 은채도 나를 배려하느라, 진짜 궁금한 것들을 참고 있었던 거였다. 결국 우리 둘 다, 서로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진짜 관계를 피해 왔던 셈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짜 친구였던 거네?”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은채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짜는 아니었어. 다만…… 불완전했던 거지. 안전하게 지내려다 보니 깊이가 없었던 거고.”
“지금부터라도 바꿀 수 있을까?”
“바꾸고 싶어?”
“응. 정말로.”
주저 없이 말했다.
“너한테 진짜 나를 보여주고 싶어. 그리고 너의 진짜 모습도 알고 싶어.”
은채가 웃었다. 예전의 완벽하고 단정한 미소가 아니라, 조금 서툴고 어색한, 진짜 같은 웃음이었다.
“사실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야. 상담사라고 해서 항상 현명한 것도 아니고, 가끔은 정말 어리석은 선택도 해.”
“예를 들면?”
“음…… 작년에 환자와 경계를 흐린 적이 있었어. 감정이 너무 이입돼서. 그 일로 슈퍼비전도 받고, 꽤 오랫동안 힘들었어.”
은채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가끔은, 사람들 고민 듣는 게 지겨울 때도 있어. 나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늘 듣는 처지 이니까······”
“나한테도 그랬어?”
“응, 가끔은. 특히 네가 ‘행복 전문가’ 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더 그랬어. 너도 비슷한 일을 하니까……”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은채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했던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외면처럼 느껴졌던 거였다.
“그럼, 이제부터는 서로한테 진짜 이야기를 하자. 좋은 친구인 척하지 말고, 완벽한 사람인 척하지 말고.”
“좋아. 근데 쉽지 않을 거야.”
은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둘 다 너무 오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가끔은 실수도 하고, 어색하기도 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어색한 것도 진짜니까.”
그날 우리의 대화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서로의 어두운 면, 부끄러웠던 기억들, 실패했던 순간들을 조심스럽게 나눴다.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쓸 때보다,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 더 가까워졌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진짜 친구가 된다는 건, 서로의 솔직한 마음 앞에서 멈추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일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은채와의 대화 이후 며칠이 흘렀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홀로 앉아 있던 순간 불현듯 마음이 멈춰 섰다. 이유 없이 괜찮은 순간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방, 창밖으로 보이는 평범한 주택가 풍경, 그 속에서 흘러가는 누군가의 하루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빨래를 너는 아주머니,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가로지르는 학생, 작은 강아지와 산책 중인 사람까지 익숙하고 소소한 장면들이 유난히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안에 있었다. 별다른 것 없는 일상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그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순간, 웃음이 났다.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입꼬리를 올렸다. 불완전한 현실을 고스란히 안고 가도 괜찮다는, 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거울 속의 나는 화장기 하나 없고, 머리는 대충 묶인 채였다. 어딘가 비대칭이고 정제되지 않은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게 진짜 웃음이구나,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며칠 전부터 망설였던 메시지를 썼다.
“언니, 편지 고마웠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편지로는 다 전할 수 없을 것 같아. 시간 괜찮을 때,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번엔 진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문자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문장 하나하나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진심만큼은 분명히 담겨 있었다.
새 공책을 펼쳤다.
‘오늘 처음으로, 행복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든 게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 감각이, 어쩌면 행복일지도 모른다.’
예전 같았으면 견디지 못했을 불확실성이, 지금은 자유로웠다. 정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 처음으로 괜찮게 느껴졌다. 그때 언니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도 만나고 싶어. 다음 주말은 어때? 이번엔 내가 서울로 갈게.”
나는 또 웃었다. 예전의 언니와도, 예전의 나와도 조금은 다른 감정이었다.
창밖엔 오렌지빛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내일이 있고, 그날들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이, 희미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문득 오래전 강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그때는 믿지 못했던 문장이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완전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보려는 태도. 그것이 어쩌면, 진짜 행복을 향한 첫걸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