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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역설 15화

역설

by 은파

알람 소리가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몇 달 전만 해도 알람 소리에 놀라 허둥지둥 일어나기에 바빴는데, 요즘은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졌다. 몸이 충분히 쉬었기 때문일까. 스스로 깨어나는 이 리듬이 낯설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11월 말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줬다. 아래층 어딘가에서 아침 요리를 하는 냄새가 올라왔고, 멀리서는 출근길 차량의 소음이 귓가를 스쳤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월요일 아침이었지만, 왠지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풍경이 더 생생하게,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내 것처럼 느껴졌다.

세수하면서 거울 속 나를 바라봤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었지만, 예전보다 분명 달라져 있었다. 표정이 편안해졌고, 눈빛도 또렷해졌다. 물론 피곤할 때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 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지겠지만, 그런 모습조차 이제는 숨기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옷을 고르면서도, 기준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 보다는 내가 얼마나 편한지가 더 중요해졌다. 완벽한 조합보다, 그날의 기분에 맞는 옷을 고르게 되었다. 오늘은 회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딱 내 느낌이었다. 거울 앞에 선 내가 낯설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하며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오전에는 출판사 미팅이 있었고, 오후에는 언니와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출판사 미팅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두 번째 책을 낸다는 사실이 버겁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기대가 되었다. 물론, 예전처럼 '더 깊어진 행복론' 같은 거창한 주제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대신 '불완전해도 괜찮은 삶에 대하여'라는, 나다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가방을 챙기면서, 며칠 전 새로 쓴 원고 초안을 넣었다. 행복 전문가로서의 조언이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 내 경험을 담은 글이다. 얼마나 오래 가짜로 살아왔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리고 여전히 잘 모르는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까지. 출판사에서 받아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이 작업이 진심이었다.

현관문을 나서며, 문득 몇 달 전의 아침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매일 전쟁을 치르듯 아침을 시작했다.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화장에 공을 들였고, 옷차림 하나도 계산해야 했으며, 심지어 표정까지 관리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모든 게 쉬워졌다.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에 사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인사만 하고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날씨가 제법 추워졌네요"라는 말을 먼저 건넸다. 짧고 소소한 인사였지만, 그런 대화 하나가 하루를 따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요즘 새삼 깨닫고 있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집 쪽을 다시 바라봤다. 몇 시간 후면 다시 돌아올 공간이었지만, 그사이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언니와의 대화에서 새로운 감정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출판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불확실성이 불안하게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설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그 일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나의 선택이고, 나의 삶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이었다. 오늘이라는 하루가,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건강한 설렘. 모든 답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이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탔다. 몇 달 전과 똑같은 노선, 똑같은 시간, 똑같은 차량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것은 그대로였고, 달라진 건 나의 눈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터널을 따라 이어지는 어둠을 바라봤다. 예전엔 그 어둠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오히려 평온했다. 어둠과 빛이 번갈아 스치는 이 풍경이 어쩐지 삶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밝기만 한 순간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어둡기만 한 시간도 없다. 빛과 어둠은 나란히 다녀야만 하는 것, 서로를 통해 존재의 깊이가 드러나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다음 역에 정차하자 우르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출근 시간이라 지하철은 금세 만원이 되었고, 몸을 조금씩 움직여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했을 것이다. 머리가 눌렸나, 옷이 구겨지진 않았나, 화장은 무너지지 않았는가. 자꾸만 나를 점검하고, 불안해하고, 스스로 조율해야만 했던 아침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이 조금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이어폰을 낀 채 고개를 흔드는 젊은 남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고 있는 중년 여성, 조용히 책을 넘기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까지—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아침을 견디고 있었다. 다들 각자의 고민과 희망, 책임을 품고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공간 안에 모인 모든 삶이 그렇게 버티고, 흐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완벽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정장, 빈틈없이 채워진 화장, 깔끔하게 빗어진 머리까지 그 완벽함 속에서 오히려 어떤 피로가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몇 달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파우더를 두드리고, 눈썹을 정리했다. 모든 동작은 너무나 익숙하고 능숙했지만, 동시에 어떤 강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치 지금 이 모습이 아니라면 세상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말을 걸고 싶어졌다. 괜찮아요,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워요. 물론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당신도 언젠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되기를······

무심코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진하지 않은 화장, 바람에 약간 흩어진 머리카락, 그저 편안한 옷차림.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졌다. 완벽하지 않아도 진짜 같았고, 그게 나였다.

지하철 안의 광고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행복한 가족들의 미소, 성공한 사람들의 자신감 있는 표정, 결점 없이 아름다운 피부와 몸매를 자랑하는 모델들이 컷마다 번쩍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저런 광고들을 볼 때마다 나도 저래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저 광고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당신의 행복을 찾아드립니다."

그 아래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여성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자기계발서 광고인지, 상담 센터 홍보인지 모르겠지만, 그 미소가 오래 머물렀다. 혹시 저 여성도 나처럼 한때는 가짜 웃음을 지었던 건 아닐까. 행복을 찾아준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행복은 무엇인지 모른 채, 그렇게 웃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진짜일 수도 있다.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수많은 발걸음이 쏟아져 나왔고, 나도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실었다. 계단을 오르며 지상의 빛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둠에서 빛으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동하는 이 과정이 왠지 오늘의 나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상에 도착하자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얼굴을 감쌌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사라졌고, 나도 출판사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아까 지하철에서 봤던 그 여성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그녀도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고 있겠지. 그 하루가 그녀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하루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몰라도, 적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한 하루는 아닐지라도, 진심 어린 하루는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몇 달 전, 이 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믿었고, 목표는 명확해야 하며, 결과는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불확실함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게 역설이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애쓸 때는 오히려 모든 게 불안정해졌고, 통제를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삶을 주도할 수 있었다. 완벽을 좇았을 땐 나 자신이 가짜 같았지만,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행복을 억지로 붙잡으려 했을 땐 오히려 멀어졌지만, 마음을 열고 흘러가게 하니, 어느새 그 곁에 머물고 있었다.

출판사 미팅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새로 제안한 기획안에 편집자들이 흥미를 보였고, 특히 ‘불완전해도 괜찮은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김 대리의 말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요즘 독자들이 원하는 건, 바로 이런 진정성 있는 이야기예요."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가슴이 뿌듯했다. 드디어 내가 나답게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 것 같아, 오래도록 막혀 있던 감정의 벽이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오후 세 시, 홍대 근처의 조용한 갤러리 카페에서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이번에는 언니가 서울로 올라온다고 했기에,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의 공간을 고르고 싶었다. 갤러리 한쪽 벽에는 한 사진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웃는 얼굴도 있었고, 우는 얼굴도 있었고,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무표정도 있었다. 어떤 사진도 꾸며지지 않았고, 그 점이 내 마음에 들었다.

언니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있었다. 지난번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옷차림은 캐주얼했고, 얼굴빛도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를 보자 조심스럽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서, 과거의 언니가 아니라 지금의 언니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와 있었네.”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여기 어때? 괜찮아?”

“좋아. 조용하고 분위기도 좋고.”

언니가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사진들도 예쁘네. 진짜 같아서 좋아.”

‘진짜 같다’라는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했어. 포장되지 않은 느낌이 좋아서.”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지난번 만남에서는 언니가 대부분 말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할 이야기가 많았다. 언니의 편지를 받고 나서 겪은 변화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가짜로 살아왔는지를 깨달은 과정,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배워가고 있다는 사실까지, 솔직히 나누고 싶었다.

“사실 언니 편지를 받고 나서······ 정말 많은 걸 생각했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언니가 나를 미워했다는 말, 처음엔 정말 충격이었거든.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해가 되더라.”

언니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해가 돼?”

“응. 나도 완벽하지 않았으니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언니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었겠지.”

그 말은 내 안에서도 오래 맴돌았던 고백이었다.

“그동안 나는 늘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도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언니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어. 얼마 전까진.”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언니 덕분에 깨달았어. 용기 내서 진실을 말해줬으니까.”

그 후로 우리는 훨씬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15년 동안 서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견뎌냈는지,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언니는 번역 일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했다.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몰입할 수 있는 삶이 지금의 자신을 가장 편안하게 해준다고도 말했다.

그러다 문득, 언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가끔은······ 가족이 그리워. 엄마, 아빠, 많이 늙으셨겠지?”

나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떠올라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많이 늙으셨어. 근데 언니 생각 많이 하셔. 엄마는 아직도 언니 대학 등록금 모으고 계셔.”

“정말?”

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응. 통장도 보여주셨어. 언니가 돌아오면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게 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

나는 언니의 손을 잡았다.

“엄마도 그때 너무 힘드셨고, 지금도 많이 후회하고 계셔. 그걸 알아줬으면 해.”

언니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사실은 가끔 연락하고 싶었어. 특히 아플 때나 힘들 때. 그래도······ 가족이니까.”

“그럼, 이제부터라도 해. 천천히, 부담 없이. 내가 중간에서 도울 수도 있고.”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도 될까? 이제 와서?”

“그럼. 15년이 지났다고 가족이 아닌 건 아니잖아. 다만,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가족이 되는 거지.”

그 말을 하며 문득 나도 깨달았다. 관계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품은 채 새롭게 다시 만드는 것이라는 걸. 지난 15년을 없던 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시간을 껴안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그게 진짜 관계라는 걸.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언니가 물었다.

“그런데 이현아,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일도 그렇고······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말할 거야? 네가 변했다는 걸?”

솔직히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이었다.

“잘 모르겠어. 당장 모든 걸 바꾸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가짜로는 살지 않을 거야. 실수해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진짜로 살고 싶어.”

“쉽지 않을 거야.”

“응, 알지. 쉽지 않을 거라는 거. 그래도 가짜로 사는 것보단 나을 거야.”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언니가 있잖아. 내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언니가 웃었다. 15년 만에 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러게. 우리 서로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이 생겼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언니는 오늘 밤 버스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쉬움보다 확신이 더 컸다. 다음에도 우리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헤어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언니, 고마워. 용기 내서 편지 써줘서. 덕분에 나도 변할 수 있었어.”

“나도 고마워. 내 얘기 들어줘서, 그리고 이해해 줘서.”

언니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이제 진짜 자매가 된 것 같아.”

진짜 자매. 그 말이 내 가슴을 조용히 울렸다.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 그렇게 우리는, 이제야 진짜로 자매가 되었다.

언니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스마트폰이 울렸다. 은채였다.

“오늘 언니 만난다고 했었지? 어땠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괜찮았어’ 정도로 대충 넘겼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를 나눴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제 뭘 할 거야?”

잠시 뜸을 들인 후 은채가 물었다.

“일 말이야. 계속 똑같이 할 거야?”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구체적으로 정한 건 없었다. 오늘 출판사 미팅에서는 새로운 방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현실로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천천히 바꿔나가려고 해. 한 번에 모든 걸 뒤엎을 수는 없으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다음 주에 예정된 강연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취소하기로 결심했다. ‘완벽한 인생 만들기’라는 주제의 강연이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런 제목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없었다. 주최 측에 연락해 솔직한 이유를 설명하고,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나머지 강연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단, 내용은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기존처럼 형식적인 조언을 나열하는 방식은 이제 의미 없었다. 대신 나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완벽하지 않은 삶,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진정성을 되찾아가는 이야기.

그날 밤,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동안 여러분께 행복에 대한 조언을 드린다고 말해왔는데요, 오늘은 솔직한 고백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도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장으로 강연을 시작해도 괜찮을까? 예전 같았으면 주저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어도 거짓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진심은 언젠가 통할 거라는 믿음도 함께했다.

며칠 뒤, 강연 당일이 되었다. 대상은 중소기업 직장인들이었고, 나는 오랜만에 낯선 떨림을 느꼈다. 완벽한 해답을 주는 전문가가 아니라, 혼란을 안고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 무대에 서는 건 처음이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실 것 같아요.”

강연을 시작하며 말을 꺼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내가 정말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버티고 있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으시죠?”

청중들의 반응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는 오랫동안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어요. 뭐든 잘해야 했고,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이어야 했고, 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고 믿었죠.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 정작 진짜 나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한 시간 동안 이어진 강연에서, 나는 과거처럼 구체적인 해결책이나 3단계 요령 같은 건 제시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경험을 나누고, 질문을 던졌으며,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저도 아직 답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이 더 낫다고 믿고, 그래서 여기 나온 거예요.”

질의응답 시간에 한 남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예전 같았으면 그럴듯한 해답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답했다.

“저도 아직 찾아가는 중이에요. 다만 확실한 건,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는 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혼자서 다 해내려 하지 말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요.”

강연이 끝난 후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전보다 훨씬 진솔한 대화들이었다.

“오늘 강연 듣고 많이 위로받았어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생각이 많아졌다. 이런 방식의 강연을 과연 계속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찾아줄까?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의미 있었다. 가짜 전문가가 아니라, 진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만났다는 점에서.

다음 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새로운 기획안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제안도 함께 전해졌다. 첫 번째 책의 개정판을 준비하며 후기를 추가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변했고, 어떤 과정을 겪었으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솔직하게 담아보라는 말이었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다. 기존의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결국은 진정성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더 정직한 작업일지도 몰랐다.

“해보겠습니다.”

편집자에게 그렇게 답했다.

“다만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톤이 될 거예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편집자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게 더 좋죠. 요즘 독자들이 원하는 건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진짜 목소리예요.”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처음 쓸 때, 저는 제가 답을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질문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정직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후기를 시작하며, 나는 이 글이 진짜 ‘내 글’이라는 걸 실감했다. 변화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제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모두가 이런 변화를 반길 리는 없다. 누군가는 여전히 명확한 해답을 원할 것이다. 그런 독자들에게는 나의 변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나 자신과 더 가까워졌다는 걸. 그리고 그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한 달 후, 다시 지하철 2호선을 탔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노선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언니가 살고 있는 도시였다. 부모님과 함께 가는 길이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한 마음으로 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만나고 싶다고, 15년 동안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승차권을 예매하는 어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분 다 알고 계셨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지만, 결국 마주하고 말해야 할 감정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지난 몇 달을 되짚었다. 모든 것이 바뀐 것 같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노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며칠 전, 도윤에게서 마지막 연락이 왔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제는 미안하거나 원망스러운 마음조차 없었다. 그는 여전히 답을 찾는 사람처럼 보였고, 나는 이제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은채와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서로에게 솔직해지고 나니 오히려 더 편해졌다. 얼마 전, 은채는 자신의 연애 문제를 털어놓았다. 전문가로서 조언을 구한 게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한 것이었다. 그런 은채의 모습이 더 진짜 친구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책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제목은 ‘역설’로 정했다. 완벽해지려 할수록 더 불완전해지고, 행복을 좇을수록 멀어지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할수록 오히려 무너지는 인생의 아이러니. 나는 그 역설들을 받아들이며, 진짜 삶이란 그런 역설 속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강연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더 이상 나를 ‘행복 전문가’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대신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런 솔직함이 사람들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보다 함께 질문하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는 걸,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부모님은 이미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두 분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어머니는 언니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해 오셨다. 언니가 좋아했던 차 한 통과 직접 뜨신 목도리. 손끝의 떨림보다 마음속의 용기가 더 크게 느껴졌다.

“괜찮을까?”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가서······”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예요. 언니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이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었고 과거를 복원하는 시도가 아니라, 그 시간을 딛고 새롭게 관계를 다시 짓는 과정이었다.

언니의 도시에 도착했을 때, 해가 지고 있었다. 언니는 터미널 앞에 서 있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울고 계셨다. 15년이라는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 눈물에는 슬픔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움,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만날 수 있음에 대한 기쁨이 함께 섞여 있었다. 완벽한 화해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날 밤, 네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어색함도 있었고, 침묵도 길었지만, 그것조차 자연스러웠다. 15년의 공백을 단 하루 만에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야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다.”

나는 그 말을 천천히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이어진 관계, 피가 아니라 마음으로 맺어진 유대였다.

집에 돌아와, 그동안 써오던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마지막 문장을 썼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감정만은 확실히 내 것이다.’

새로운 일기장을 꺼내 첫 페이지를 펼쳤다. 무엇부터 써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단순한 문장을 적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실수투성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진짜일 것이다.’

창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정한 듯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불확실한 소리가 마치 우리 인생과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불확실성이 두렵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들어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아.’

답장이 왔다.

‘나도 그래. 이제 진짜 자매가 됐네.’

문득 거울을 보았다. 웃고 있는 내가 있었다. 완벽한 미소는 아니었다.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 있었고, 정돈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진짜 웃음이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을 받아들였기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내일 아침도 다시 지하철을 탈 것이다. 익숙한 노선, 정해진 시간, 반복되는 출근길 속에서 광고판 위의 사람들은 여전히 완벽한 미소를 지을 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민을 품은 채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이제 달라져 있을 것이다.

완벽한 답은 아직도 없다. 나는 앞으로도 실수할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며, 가짜 같은 순간들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되찾으려 애쓸수록 멀어졌고, 놓아버리자 오히려 가까워졌다. 사랑받으려 노력할수록 외로웠고,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진짜 관계들이 찾아왔다. 강해 보이려 할 때는 오히려 더 약했지만, 약하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진짜 힘이 생겨났다. 이처럼 삶이란 또 하나의 역설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역설의 중심에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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