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내 이야기를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면서도 내 기억이 내가 쓴 글에 갇히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글로 박제된 것들 이외에도 분명 내가 느꼈던 감정이 있었고 타인과 나눈 교감의 순간이 있었는데 글에 모든 걸 담을 수가 없다 보니 내 기억이 글 하나에 담겨서 나머지 것들은 희미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어느 한 시절이 알량한 내 몇 글자로 단정 지어지는 것만 같다. 이마저도 욕심이겠지. 어쩌면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실은 무언가를 쓰면서 이토록 사유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일 텐데. 사느라 바빠서 사유고 나발이고 하루를 살아내는데 급급할 때도 있을 터이니 이 또한 감사히 여기련다.
오늘로써 이 이야기가 끝이 난다.
그동안 내 부족한 글을 읽어주고 조용히 하트를 남겨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글쓰기'라는 오랜 소원을 이루게 해 준 나의 솔지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내 서른여섯의 가을은 온통 너로 기억될 거야.
...
서씨와 첫 만남이 있고 바로 이틀 뒤였다. 띵동. 알림음과 함께 핸드폰 푸시 알림으로 내 외환계좌에 다섯 자리 숫자가 찍혔다. 재산분할을 끝으로 내 이혼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도망치듯 떠나왔던 날로부터 무려 2년이 걸렸다. 핸드폰을 열어서 계좌를 확인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끝이 날까 동동거리던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오다니. 도대체 언제까지 그 기억을 끌어안고 같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맴맴 돌아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 토로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던 나에게 마치 이제는 훌훌 털고 앞으로 나가라는 신호탄 같았다.
체육대회에서 빵! 총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지 못했다. 혼자서 엉거주춤하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먹에 힘을 꽉 쥐고서 터덜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달려 나갔었다. 그때처럼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이메일을 열어서 전남편에게 줌으로나마 얼굴을 보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휴가를 내고 긴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다음날 그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연락을 해왔고 각자의 화면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몇 분 동안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서로 연거푸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스물일곱에 만나서 서른둘까지 내 찬란했던 시간을 함께해 준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두 마디뿐이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세상이 온통 내 것 같은 충만함을 내 생애 처음으로 안겨준 사람이자, 나의 우울을 끌어안고 점점 얼굴이 반쪽이 되어가던 사람이었다. 몇 번인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웃어 보였다. 혹시라도 카노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꼭 알려주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인사를 마쳤다. 화면을 끄고서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어떻게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수업을 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정신으로 눈을 뜨고 말을 했을까. 어릴 땐 이별을 하면 울기만 하느라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던 것도 같은데 그래도 서른넷의 나는 이혼을 하고도 밥을 먹고 출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출근은 해야지.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나와서 지하철역 플랫폼에 서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서씨였다. 막장드라마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극적인 타이밍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정도면 아무리 아침드라마 시청자라고 할지라도 욕할 노릇이었다. 그는 내게 유튜브 링크로 노래 한 곡을 보내왔다.
제목은 '너는 나의 문학'. 가사는 이랬다.
너는 어느 얼굴 없는 소설가의 문학 첫 문장.
아니, 그걸론 부족한데.
너는 어느 이름 없는 소설가의 마지막 문장.
안돼, 이것도 부족한데.
너는 나의 노르웨이의 숲. 너는 나의 데미안.
너는 나의 설명할 수 없는 책.
나는 너를 나는 너를
계속 읽고 싶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읽고 싶어. 해져 찢어질 때까지.
아아.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가사마다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후로 서씨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하기는 어렵고, 뭐랄까. 건조하지만 따뜻했고 뜨겁진 않았지만 포근한 연애였다. 무엇보다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듬해 3월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첫 만남 이후로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사실 결혼식은 죽어도 올리고 싶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초혼인 그에게는 그의 가족이 원하는 형태의 결혼식이 필요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 몫의 청첩장으로 단 열 장을 받았다. 누구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친구 몇 명에게 조심스럽게 청첩장을 건네고 모바일 링크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친구들에게서 변치 않은 애정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 마음 같지 않은 관계를 확인하고 의도치 않게 상처를 받기도 했다. 결국 내 두 번째 결혼식엔 나의 아빠, 엄마, 오빠, 그리고... 솔지가 와주기로 했다.
비가 오는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진해의 한 웨딩홀에서 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벚꽃으로 유명한 군항제가 이제 막 개막했지만 아직 날이 쌀쌀해서 꽃망울이 채 터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빠랑 엄마는 내 재혼 소식을 결국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고 신부 측 손님으로는 단 한 명이 올 예정이었다. 천군만마 같은 한 명. 평택에 사는 솔지가 아이 셋을 친정 엄마와 남편에게 맡겨두고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진해역까지, 택시를 타고 웨딩홀까지 왔다. 나의 첫 번째 결혼식에선 지각을 했던 솔지가 이번엔 신부대기실에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과 사진을 찍고 신랑과 포즈를 취하며 몇 컷을 더 찍고 나서야 솔지의 차례가 왔다. 솔지가 내 옆에 앉더니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야. 저번보다 훨씬 예뻐. 드레스가 아주 그냥 너랑 찰떡이네."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빵 터져서 갤갤갤 웃었다.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는 건 솔지뿐이었다. 신랑 가족들과 친구들이 끊임없이 신부대기실로 찾아왔고 내 손님이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왁자지껄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머쓱하고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 아빠랑 엄마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나는 신랑을 쳐다보거나 아니면 하객석에 있는 솔지를 눈으로 찾았다. 그때마다 솔지는 나에게 눈빛으로 온 힘을 다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현아 괜찮아. 여기 내가 있어. 나중에 결혼식 원본 사진을 받아봤을 때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줌아웃으로 찍힌 모든 사진에 솔지의 뒷모습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카메라에 담느라 바쁜 뒷모습, 나만 보면서 내게 용기를 실어주던 솔지의 뒷모습이었다.
그 사진에서처럼 열여섯 살부터 솔지는 나를 계속해서 봐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확 가까워지기도 훌쩍 멀어지기도 했었지만 그녀가 내 친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단지 친구라는 이름의 관계를 넘어서 인생을 살아가는 궤적을 솔지와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란히 맞이할 마흔의 우리를, 예순의 우리를 가만히 그려본다. 그때도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꺽꺽 웃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면 마흔도 예순도 별것 아닐 것만 같다.
...
너에게 쓰는 연애편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