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또 산

by 나타날 현


지난달에 쓰기 시작한 이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포기하지도 이어나가지도 못하고 숙제처럼 끌어안고 있다. 남은 결말이 뻔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한 줄로 끝날 이야기를 쓰기만 하면 되는데 어쩐지 간지럽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해서 질질 끌고 있다. 이왕 칼을 뽑았으니 두부라도 썰면 그만인 것을. 뭘 또 이리도 무겁게 생각하고 있나. 그래, 써버리자. 쓸란다! 자리에 앉았으니 쓸 수 있다! 화이팅! 오예!



...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내 땅에 발을 붙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혼 절차가 나를 자꾸만 멈춰 서게 했다. 앞으로 한발 내디딜만하면 전남편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필요한 서류를 그때그때 준비해서 보내놓고 다시 한 발을 내디디려고 하면 또 이메일이 왔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묵묵히 3년 간의 결혼 생활을 함께 매듭지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내 꿈에 카노가 여러 번 나왔다. 꿈속에서 나는 카노의 리쉬를 잡고 어딘가를 끝없이 걷고 있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영락없이 베개가 젖었다. 딱 한 번만, 카노를 안아보고 싶었다. 내가 울면 내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서 온기를 전하던 그 녀석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마다 카노의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다. 첨부파일로 받아본 사진과 영상 속에서 카노는 나 없이 해맑게 뛰어다니고 웃고 있었다. 짜식. 잘만 지내고 있네.

카노를 돌보며 내가 떠난 집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전남편을 생각하면 뒷목이 뻐근해졌다. 그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하나만 생각하느라 그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모른척했던 것이 뒤늦게 죄책감으로 밀려왔다. 내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맞는 걸까.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번은 미국에 잠깐 오겠냐는 그의 제안에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향했다. 어쩌면, 이라는 가정 하에 가방 하나를 가볍게 챙겨서 다시 떠났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은 역시나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명확히 보였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맞다. 나는 그곳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전 세계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샌프란시스코는 분명 아름답고 풍요롭고 생기로웠다. 다만 나에게 천국이 아닐 뿐.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 카노와 매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산책을 했다. 카노야, 잘 지내. 이렇게 명랑하게 그 사람 옆에 있어줘.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이제는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앞이 또렷하게 보였고 숨이 한결 편안해졌다는 걸 느꼈다. 내 인생에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것 같았다. 유학원에 퇴사를 통보하고서 몇 군데 영어 학원에 이력서를 넣었다. 면접에서 호기롭게 연봉을 불렀는데 오라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와우. 나 좀 살만하겠는데.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서 영어강사로서 근무를 시작했다.

나를 쪼그라들게 했던 내 모자란 영어가 나를 벌어먹게 했다. 미국에서 살면서 체득한 영어는 수업 현장에서 생각보다 매우 쓸만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억양과 발음이 일취월장해 있었다. 버릴 경험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매 순간 실감했다. 수업에 자신감이 붙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출근을 할 때마다 내 자신이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이혼 절차가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채로 일 년이 넘도록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법적으로 나는 유부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혼녀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면 그 사실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특히 친구를 만날 때 그랬다. 주변을 돌아보니 서른셋의 내 친구들은 모두 결혼하고 안정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다들 전속력으로로 뛰어나가고 있는데 나만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와서 멈칫거리는 꼴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친구 입에서 나온 '힘들겠다'는 말조차 어느 날은 삼켜지지가 않았다. 꼬인 사람은 본인이 꼬인 줄도 모르고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걸 그땐 알 도리가 없었다. 네가 왜 나한테 힘들겠다고 말하는 건데. 내가 안 힘들다는데. 씩씩거리면서 친구를 멀리했다. 사실은 내가 초라해 보일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산 넘어 산이었다.




...

keyword
이전 08화살아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