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면 다 좋은 시절이지, 암.

by 나타날 현


열 번째 글이다. 이 자리에 앉아서 열 번의 글을 써 내려갔다는 사실이 스스로 대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글도 글이지만 내 이야기를 밖으로 꺼낼 만큼 내가 단단해졌다는 것도 뿌듯하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에 손발은 시릴지언정 이제 더 이상 추위에 꺾여 몸을 웅크리고만 있지 않겠다는 마음이 든다. 바람아 불어라. 얼마든지 불어라. 나는 끄떡하지 않을 테다!


...



대학시절 친구와의 만남이 내게 꽤나 큰 상처가 되어 몇 달을 마음고생을 했다. 내가 진짜 힘들어 보였나. 나는 그 친구에게 왜 힘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까. 그가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왜 그렇게도 자존심이 상했을까. 고민이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나 자신이 더 궁상맞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솔지를 만났다. 홍대에서 만나서 솔지가 가고 싶다던 식당에 들어갔다. 주문했던 파스타가 나오고 몇 가닥을 입에 넣다 말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솔지 앞에선 어김없이 무장해제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아이씨. 너 보니까 왜 갑자기 눈물이 나냐. 잘 지내고 싶은데. 잘 지내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나 그게 너무 힘들어 솔지야. 어떤 날은 다 괜찮다 싶다가도 또 어떤 날은 땅이 쑥 꺼지는 것 같아.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수업을 한 날에도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숨을 푹푹 쉬며 밤하늘을 원망스럽게 째려봤던 나날들이 솔지 앞에서 날것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금방 괜찮아질 수가 있겠어. 어쩐지 요즘 씩씩한 척한다 했다 너.
- 야. 나 좀만 더 울어도 되지.
응. 식당에 우리밖에 없어. 옆에 커플들 다 나갔어. 울어 울어. 더 울어.

나는 테이블에 놓인 냅킨이 다 없어질 때까지 울었다. 내게 '힘들겠다'라고 말했던 그 친구 앞에서도 사실은 이렇게 울고 싶었다는 걸 울면서 깨달았다. 화장을 시작하고 만난 친구는 화장한 얼굴로만 만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대학 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에게 내가 작아진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나보다 평안한 그녀의 모습이 부러웠지만 부럽다고 말도 못 하는 내가 밴댕이 소갈머리뿐이 못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다 남긴 채 식당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2층 테라스가 있는 펍으로 갔다. 한낮에 맥주를 앞에 두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청춘들을 구경했다. 홍대에 멋 부리고 나온 젊은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우리도 모르게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게 되었다. 데님으로 옷을 맞춰 입은 듯한 20대 여자애들 무리가 까르르까르르 웃으면서 지나갔다.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한 명이 웃으니까 옆에 있던 여자애가 웃고 또 그 옆의 여자애가 맞장구치다가 아예 무리 전체가 걸음을 멈추고 다 같이 웃고 있었다.

좋댄다.
- 그러게. 얼마나 좋겠어. 좋겠지. 좋겠다 지지배들아!

우리도 웃었다. 깔깔깔. 우리는 뭐 늙었냐. 우리도 젊다. 흥. 우리가 더 재밌지롱. 너넨 애도 없지? 너넨 이혼 안 해봤지? 늬들이 뭘 알겠냐 이것들아. 아줌마 둘이서 젊음을 시기하는 만담을 펼치면서 우리도 웃었다. 지나면 다 좋은 시절이야. 그치. 맞지. 오늘도 또 지나간 한때일 텐데 그 친구 미워하면서 이 좋은 시절 보내지말어, 응? 너 걱정해서 그랬을 거야. 그래, 알지.

솔지를 만나고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속이 좁아서 그랬노라고 진심을 전했다. 통화를 마치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이제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미워하는 것도 그게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초라하게 보는 것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 드라마였던 '나의 아저씨'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저앉아서 자기혐오에 빠지는 쪽이 되려 편하다고 느끼던 나에게 서서히 안녕을 고했다. 생각해 보니 신경정신과 약을 마지막으로 복용한 날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울증이라는 지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내게 봄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여름이 올락 말락 하던 유월의 어느 날. 내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마산에서 온 서 씨라고 했다.





...


keyword
이전 09화산 넘어 또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