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이 간질거린다. 비교적 최근의 일을 떠올리며 그때를 텍스트로 남겨놓으려니 좀 쑥스럽다. 아이구 이거 참... 어떡해야 하나. 한 줄도 못쓰겠다. 제목만 달랑 써놓고 한 시간째 이러고 있다. 이럴 때, 뭐라도 쓰게 만드는 나만의 마법의 문장이 있다. "네 글이 나한테는 잘 안 읽혀." 푸하하. 처음 들었을 땐 좌절스러웠지만 어차피 누군가에겐 안 읽힐 글이라고 생각하면 못 쓸 것도 없다. 읽히지도 않을 글. 오늘도 어디 한 번 내 멋대로 써보자. 아자!
...
서씨를 처음 만난 건 을지로에서였다. 어느 월요일 저녁 7시 반, 을지로3가역 12번 출구. 그가 먼저 도착해 있었고 나는 지하철을 환승하려다가 놓쳐서 10분쯤 늦었다. 헐레벌떡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어떤 남자가 아는 척을 해왔다. 남색 면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노랑색 프라이탁 가방을 한쪽으로 맨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첫눈에 알았다. 안타깝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걸.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큰 남자였다. 키와 덩치가 큰 건 둘째치고 얼굴도 큰데 눈은 또 어찌나 큰지 뚜렷한 쌍꺼풀 안으로 까만 눈동자가 바로 보였다.
에라이. 저녁이나 맛있게 먹고 얘기나 재밌게 나누다가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소개팅이 그렇지 뭐. 카톡에서 꽤 티키타카가 맞았으니 대화가 썩 나쁘지는 않으리라. 당시에 근무하고 있던 학원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업하고 월요일이 휴일이었던지라 월요일 저녁이 나에겐 남들의 일요일 저녁처럼 소중했다. 집에 누워있는 것보다야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재미가 더 낫겠다 싶어서 나온 건데... 아이 그냥 집에서 쉴 걸 그랬나.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숨기고 예의상 웃음을 지어 보이며 냉삼집으로 함께 걸어갔다. 카톡으로 냉삼겹살과 이자카야 둘 중에 고르라고 하길래 내가 고른 메뉴였다. 소개팅이라고 해서 우아한 척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아먹으며 내숭을 떠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아 물론, 20대 때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모시고 예쁜 식당에 데려가야 남자가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착각했었으니까. 막상 고급 진 식당에 들어가면 나는 기가 죽어서 나를 그 식당에 걸맞는 여자로 포장하기 바쁠 뿐, 제대로 나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이쁜 척만 하다가 배고픈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래서 고른 메뉴가 냉삼겹살이었다.
냉삼집 1층에는 이미 대기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알고 보니 2층이 식당이고 1층을 통으로 대기 공간으로 쓰는 맛집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을 적어놓고 낡은 TV 하나와 포장마차 의자가 빼곡하게 놓여있는 곳에 둘이서 나란히 붙어 앉았다. 무슨 일 하세요. 질문 하나를 던졌을 뿐인데 그가 줄줄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인테리어 관련된 일을 하고 있고 대학 때 건축을 전공했다고 했다. 대학시절에 교수의 제안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다고도 했다. 우와 프랑스요? 불어 잘하시겠네요, 했더니 가기 전에 봉주르밖에 모르고 유학을 갔다 왔단다.
사람이 다시 보였다. 나는 영어를 전공하고도 미국에서 낑낑거렸는데 불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학 수업을 들었을까. 그가 좌충우돌 프랑스 유학 스토리를 술술 얘기했다. 자기 이야기를 맛깔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중간중간 리액션을 하면서 힐끗 그의 옆얼굴을 살펴보니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큰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민망한 듯 슬쩍 웃으면서 말하기를, 프랑스에서 4년을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지만 끝내 졸업을 못했단다. "그래서 저 사실 고졸이에요." 맙소사. 이렇게 솔직한데 유쾌할 수가 있나. 갑작스러운 고졸 고백에 웃음이 터졌다. 내가 숨도 못 쉬고 꺽꺽 웃으니까 그가 따라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잠깐 바람 쐴까요? 혹시 흡연하세요?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좁은 골목에 마주 보고 서서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시 보니 아줌마들이 좋아할 얼굴이었다. 80년대 고전 영화에 나올 법한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그리고 목소리엔 울림이 있었다. 여전히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뭐,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처음 만난 남자와 이 정도까지 재밌기도 쉽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그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살짝 감쌌다. 어쭈, 잘 아네. 나보다 네 살이 많다고 했던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 연륜이 느껴졌다.
식당으로 다시 들어가자 점원이 우리 보고 2층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했다. 철판에 깔린 알루미늄 호일 위로 삼겹살을 구우며 그가 소맥을 말아서 내 앞으로 건넸다. 반갑습니다. 잔을 부딪히며 다시 인사를 나눴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과 실망감은 이미 사라졌고 그를 이제야 제대로 마주한 것 같았다. 하지만 딱히 예쁘게 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였는지 나는 부끄러움 없이 상추쌈을 싸서 입을 크게 벌리고 삼겹살을 와구와구 먹었다. 맛있게 잘 드셔서 좋네요. 그가 내 앞접시에 고기를 끊기지 않게 놓아주었다. 행동에 어색함이나 쭈뼛거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 주문했던 삼겹살을 다 먹어갈 즈음에 식당 주인이 올라와서 10시에 식당이 마감한다고 말했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그와 함께 있은 지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식당을 나와서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을지로 하면 역시 야장이죠, 하며 그가 야외 테이블이 깔린 야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테이블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생맥주 두 잔과 노가리를 주문했다. 짠! 맥주잔을 부딪히고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자 목구멍이 따끔거리더니 이내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그리고 왠지 모를 웃음이 나도 모르게 피식 새어 나왔다.
어? 저 핸드폰이 없어요.
그가 갑자기 가방과 바지 주머니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지금까지 능숙함과 노련함을 뽐내던 남자가 갑자기 허둥거리고 있었다. 아니 제가 아현 씨 번호를 이렇게 따려던 건 아니었는데 죄송하지만 전화 좀 해주실래요? 그 말은 또 왜 이렇게 웃긴 건지. 그러고 보니 그가 하는 말마다 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받아서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어디서도 그의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 식당에 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다며 그가 자리를 비웠다. 혼자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그가 내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에이 뭘 뛰어오고 그래요.
- 아, 걷다가 저기 보이는 데부터 뛰었어요.
뭐지. 이 남자 개그맨인가. 왜 자꾸 웃기지. 생맥주와 밤공기가 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때다 싶어서 제일 숨기고 싶은 부분을 고백했다. 이미 고졸을 고백한 남자에게 내가 말 못 할 것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저는 사실 이혼했어요.
- 한 번이요?
뭐야. 무슨 대답이 이래. 아니 그럼 한 번이지 두 번을 어떻게 하냐고 되묻자, 이 나이쯤 되니까 주변에 두 번 세 번도 왔다 갔다들 하길래 물어본 거란다. 참고로 본인은 한 번도 안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나에게 아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개는 있었다고 답했더니 그가 말했다.
그럼 뭐, 길고 복잡한 연애하신 거네요.
길고 복잡한 연애라... 그가 한 말을 속으로도 바깥으로도 두 번 세 번 곱씹었다. 맞다. 그랬다. 나의 길고 복잡했던 연애가 끝이 난 지 2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후에 생맥주를 한 잔씩 더 주문했고 이야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월요일이라서 일찍 마감하겠다며 사장님이 옆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는 데마다 자꾸 감질나게 나가라네요. 이번엔 어딜 갈까요?
시간을 확인해 보니 12시였다. 시간이 잘도 흘렀다. 대로변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 시간에 문을 연 곳이 주변에 별로 없었다. 그나마 불이 켜져 있는 프랜차이즈 맥줏집으로 우리는 들어갔다. 한 잔씩만 더하고 집에 가자며 그가 스탠딩 의자에 앉았다. 밖에 있다가 실내의 환한 조명 아래서 그를 다시 보니 문득 그의 얼굴이 잘생겨 보였다. 송아지처럼 큰 눈. 서양인처럼 긴 속눈썹. 높은 콧대. 또렷한 입매. 그의 이목구비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다가 내가 말했다.
어머, 저기요. 근데 지금 보니까 잘 생기셨네요. 잘 생긴 얼굴이셨네. 어머? 진짜 잘 생기셨네요?
- 아니 그걸 이제 알았어요?
그가 하는 말 중에 더 이상 웃기지 않은 말이 없었다. 웃느라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맥주잔을 비우자마자 쿨하게 헤어졌다. 내가 택시를 타고 가는 걸 그가 지켜보았고 집 앞에 택시가 도착했을 때 그에게서 잘 들어갔냐는 카톡이 왔다. 새벽 두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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