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꼭 연애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얼른 할 일을 마쳐두고 보고 싶고 내 얘기를 마구 하고 싶은 이 마음. 연애할 때의 마음과 다름없다. 솔지는 심지어 나랑 바람난 것 같다고도 말했다. 틈만 나면 내 블로그에 들어오고, 애들을 재워두고 나랑 얘기하고 싶어서 수시로 카톡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 무진장 즐겁다고 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이 시기가 어떻게 기억되려나. 우리 그때 그랬지, 하면서 추억할 거리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글을 최대한 오래오래 써 내려가고 싶은데... 이제 어느덧 결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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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작가의 책 '모순'의 시작이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주인공 안진진처럼 나는 내 생애를 다 걸겠다는 다짐으로 하루를 허겁지겁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를 바쁘게 만들어서 우울한 틈을 만들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이 지냈다. 강남역에 있는 유학원에 이력서를 내고 얼마 안 되어 바로 취직을 했고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고 성과를 내고 자축하며 다음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즐겁게만 느껴졌다.
급히 구했던 오피스텔에서 3개월 단기 계약이 끝나고 나는 다시 엄마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 앞에는 여전히 결혼식 사진이 걸려 있었다. 더 이상 치워달라고 말하기도 피곤했다. 그래서 최대한 밖으로 나돌았다. 미국에 있을 때 자주 못 만났던 친구들에게 일부러 연락을 해서 만나기도 하고, 유학원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다.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 건지 숨겨야 하는 건지 매번 고민스러웠지만 대체로 나는 분위기를 봐서 밝히는 쪽을 택했다. 네, 저 이혼했어요. 애는 없고 개는 있었어요.
시간은 성실하게 잘도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술과 담배가 차근차근 늘었다. 알콜이 몸에 안 받는다고만 생각해서 20대부터 술자리라면 무조건 피하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친해질 생각조차 없었는데 이게 웬걸. 손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던 정신을 술의 도움을 받아 살짝 놓으니까 이렇게 즐거운 것을. 술 마시다가 담배 피는 사람들과 골목으로 나와서 짝다리를 짚고 담배연기를 뿜을 때면 요상한 해방감도 들었다. 남들은 10대, 20대 때 해볼 만한 일을 나는 서른두 살이 되고 나서야 시작했다. 인생에 있을 지랄 총량의 법칙을 착실하게 채워나가는 중이었다. 집에 기어서 들어오는 날이 늘어가면서 엄마와 아빠의 한숨도 함께 늘어갔다.
한 번은 술을 진탕 마시고 택시를 탔는데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순간 겁이 났다. 택시 뒷자리에 쓰러져서 우선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지금 택시 탔는데 아파트 정문으로 나와줘. 나 지금 못 걸을 것 같아. 택시가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나를 뒷좌석에서 끄집어냈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니까 술기운이 확 올라서 아파트 정문 앞 하수구에다 먹었던 걸 다 게워냈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등을 두들기기만 했다.
엄마의 부축을 받아서 집까지 걸어가는데 술이 취해서였는지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딸꾹질도 함께 나왔다. 웃으면서 딸꾹질까지 하려니까 그조차도 웃겨서 나는 몸을 더 가누지 못했다. 엄마 진짜 웃기다 그치. 다 큰 딸 데리고 사는 거 재밌지. 내가 이럴 때도 있네. 남들은 이런 걸 20대 때 졸업한다는데 엄마랑 아빠가 나 통금 걸어놔서 그때는 못했잖아. 그러니까 지금 이래도 엄마가 나 봐줘야 돼. 딸꾹질을 하면서도 할 말을 다했다. 집에 들어와서 쓰러지듯이 내 방 침대에 눕자, 엄마가 내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솜에 클렌징 워터를 적셔서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은 살아서 나는 누워서도 말을 계속했다.
엄마 고마워. 근데 엄마. 나 좀 그만 딱하게 봐. 나는 잘 살 자신이 있거든. 나 진짜 진짜 잘 살 건데 엄마가 나를 자꾸 짠하게 보면 나도 내가 자꾸 불쌍해져. 그러면 전보다 잘 살 수가 없을 것 같단 말이야. 근데 그러려고 돌아온 거 아니잖아. 나 엄마 딸이고 아빠 딸이야. 내가 누구 딸인데 못 살겠어. 나 김아현이야. 나 잘만 살 수 있어. 엄마가 나를 믿어줘야 내가 잘 살 수가 있다구. 그니까 나 좀 믿어줘라 좀.
엄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알겠어. 너도 이혼이 처음이지만 엄마도 이혼한 딸은 처음이라 그래. 어쩌겠니.
그 말에 엄마랑 나랑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때부터 엄마와의 관계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집 근처에 있는 절에 가서 나란히 백팔배를 올리기도 하고 아빠랑 다 같이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막걸리를 마시고 집까지 하염없이 함께 걷기도 했다.
살면, 살아지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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