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곱 번째 글이다. 거의 2주 동안 이것만 붙잡고 살고 있다.
요즘 내 하루는 이렇다. 새벽 6시쯤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노트북을 켜고 블로그에 들어온다. 새벽 갬성을 가득 담아서 쓰고 싶은 만큼 글을 써놓고 솔지에게 굿모닝 인사와 함께 카톡으로 날것 그대로의 글을 보낸다. 그리고 헬스장으로 곧장 향한다. 운동을 다녀오고 돌아올 즘이면 솔지가 아이들을 등교시켜 놓고 내 글에 무한 공감과 위로를 해주며 카톡을 보내온다. 그러면 나는 운동 후의 더 맑아진 정신으로 써둔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수정한다.
이때부터가 진짜 재밌다. 텍스트를 마음껏 주무르고 다듬으며 내가 쓴 글 안에서 혼자 실컷 뛰어노는 기분이 든다.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 할 막바지 순간까지 같은 자리에 콕 박혀 있다. 글을 완성하게 되면 블로그 링크를 솔지에게 던져놓고 점심을 먹고 나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에 오르면서도 내 블로그에 내가 수십 번 드나들면서 읽고 또 읽는다. 매일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동안 학원에서는 이번 학기 중간고사 대비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수업이 계획대로 잘 되면 그건 그거대로 좋고 안 돼도 딱히 상관이 없다. 내 진짜 즐거움은 여기에 있으니.
그래서 이 글이 끝나면 후련하면서도 어쩐지 섭섭할 것 같다.
...
이혼을 결심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편도로 끊었다. 귀국 날짜를 기다리면서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에 있을 땐 밖을 나가는 일이 꼭 잠수하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나설 때 숨을 참았다가 다시 들어올 때 몰아 내쉬는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까지 긴장하면서 살았나 싶지만 그때는 그랬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좀 가볍게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달랐을까.
한국에 오면 그래서 마냥 마음이 편할 줄 알았다. 그토록 눈물겹게 그리워했던 엄마 품으로 돌아가는 건데 당연히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내가 돌아온 곳은 내 집이 아니라 엄마 집이었으니까. 집에 들어서자 현관에 내 결혼식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제발 그것 좀 치워달라고 부탁도 해보고 애원도 했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집을 오고 나갈 때마다, 현관을 거쳐서 화장실을 갈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엄마는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결혼식 사진을 보다가 추억에 젖어 마음이 바뀌고 그러다 내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엄마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연락 왔어? 뭐래?
다시 숨이 턱 막혔다. 엄마는 안타까운 눈빛을 장착하고 끝도 없는 질문으로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아빠는... 한동안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처음 이혼 얘기를 꺼냈을 때 아빠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아빠를 볼 때마다 떠올랐다. 절대 내 편이 아닌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와 둘만 있게 되는 상황을 어떡해서든 피했다. 아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게 이혼하고 돌아온 딸을 위한 배려였는지, 결혼생활에 실패한 딸에 대한 실망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내가 '미국병'에 단단히 걸렸듯이 엄마랑 아빠도 비슷한 병에 걸렸던 게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미국으로 시집간 우리 딸 병'이랄까. 내가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게 어떤 자부심이자 자랑거리였는지도 몰랐다. 그걸 다 내팽개치고 '이혼한 딸'로 돌아온 나를 엄마도 아빠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미국에서 챙겨 온 짐은 달랑 캐리어 가방으로 두 개였다. 옷가지들과 책 몇 권이 다였다. 책장 가득 모아두었던 책들을 싸짊어지고 올 수 없어서 나에게 소중한 것들은 결국 다 두고 온 셈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도 없는데 당장 정리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 내 방에 캐리어 가방을 그대로 세워둔 채 며칠을 지냈다. 외출하고 들어온 어느 날, 가방 두 개가 내 방 바닥에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엄마가 정리해 준답시고 내가 나가있는 사이에 가방을 열어둔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입고 쓰던 것들이 바닥에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 있었다. 그걸 보는데 마치 내가 쓴 생리대가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정리할 건데 왜 엄마가 이런 것까지 마음대로 열어보는 건데 왜. 나도 시간이 걸릴 거 아니야. 엄마면 나한테 이렇게까지 엄마 멋대로 해도 되는 거야? 나한테 진짜 왜 그래. 큰 캐리어 가방을 다시 잠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대로 열어놓을 수도 없고 어쩌지도 못한 채 화를 내다가 울고 있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누구는 결혼하면서 이것도 받았다 저것도 받았다 하던데 너는 왜 가방이라고는 천 쪼가리 에코백밖에 없고. 이게 뭐야. 네가 정리하면서 가슴 아플까 봐 내가 열었다 왜. 근데 이게 뭐냐고 이게.
엄마도 울고 있었다.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에 내 자신이 명품인데 촌스럽게 그런 게 뭐가 필요하겠냐며 시댁에서 해주겠다는 선물을 한사코 거절만 했던 것이 처음으로 후회스러웠다. 그땐 그게 더 멋있는 줄 알았다. 까짓것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을걸. 엄마가 이렇게 속상해할 줄 알았나 뭐. 나보다 예민하고 눈물이 많은 엄마와의 동거가 시작됐음을 그때 실감했다.
이후에도 엄마와 나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먹고 자는 것부터 엄마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밥을 안 먹고 싶다고 해도 끝까지 나를 식탁으로 끌어내었고 더 자고 싶어도 굳이 내 몸을 직접 일으켜 세워서 공원을 돌자고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엄마의 눈빛과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나를 망가지게 두지 않는 건 엄마밖에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루하루가 눈물겨워서 이거 어디 살 수가 있나. 그래서 집을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다.
1.5룸의 오피스텔을 급하게 구해서 기본적인 것만 들여놓고 혼자 살아보기로 했다. 방을 구해서 독립했다는 소식에 솔지가 놀러 왔다. 아이들을 친정 엄마에게 맡겨두고 무려 1박 2일의 시간을 내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매트리스가 아직 배송되지 않았을 때라 거실 한쪽에 놓인 좌식 소파에서 솔지가 자고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자기로 했다.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며 그 작은 거실에서 둘이서 배가 찢어지도록 웃었다. 솔지가 우리 이제 방도 있는데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자고 했다. 둘 다 술이라면 젬병인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그래 어디 마셔보자. 맥주 여섯 캔을 사서 치킨 한 마리를 시켜놓고 시시껄렁한 얘기만 계속했다. 그러다 솔지가 갑자기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야, 내 친구 중에 이혼한 건 네가 처음이야. 아유 선배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내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해 준 건 나야말로 솔지가 처음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별말이 아니어도 방이 울리도록 꺽꺽 웃어댔다. 방바닥을 떼굴떼굴 굴러가며 웃고 있는 내가 이제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맥주 한 캔씩을 채 비우지도 못하고 웃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산책 겸 동네를 흐느적거리며 걸으면서 나는 엄마 얘기를 꺼냈다. 미국에서 5년을 있었는데 어떻게 값어치 있는 건 하나도 없냐며 가방이라고는 에코백밖에 없다는 것에 엄마가 오열했다는 그 이야기에 솔지가 말했다. 너도 참 너다. 대단한 환경 운동가 나셨네. 그 말이 나는 또 그렇게 웃겨서 길을 걷다 말고 배를 잡고 웃었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솔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이렇게 살면 되겠다 싶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나 이제 살 수 있다...
나의 오랜 우울증에 솔지는 가장 확실한 명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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