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스릴러 영화는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주인공이 죽을 뻔한 위험을 수차례 겪을 때, 그래서? 그래서 죽은 거야? 산 거야? 결말을 알아야 끝까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쫄밋 거리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는 것이 너무 피로했다. 왜 이 고생을 남들은 사서 할까. OTT로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이 오면서부터 긴장감이 내 역치를 넘어서는 것 같다 싶으면 그냥 마지막 회를 틀던가, 마지막 장면을 먼저 봤다. 아, 사는구나. 휴, 그럼 볼 수 있겠다, 하면서.
오늘 써나갈 이야기가 내게는 그런 느낌이다. 드라마였다면 그래서? 극복을 했다는 거야? 포기했다는 거야? 건너뛰기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던 때의 이야기다. 다행히도, 나는 결말을 알고 있다. 아주아주 건강하고 평안하게 이 글을 적어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를 많이 사랑해서, 내가 쓰는 이 글까지도 사랑해 주고 있는 솔지와 조 여사님에게 당부하고 싶다. 지금의 저는 어느 때보다 안녕하오니 부디, 마음 편히 읽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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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호르몬 탓을 했다. 툭하면 울고 싶은 시기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돌아왔었기에 이번 달에도 PMS가 심한가 보다 했다. 게다가 나는 원체도 눈물이 많지 않았던가.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우는 건 내 성격의 일부라고 이미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와락 눈물이 나오고 나면 개운해지기 마련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 하루 종일 지속되거나 울어도 개운치가 않았다. 주변을 살펴볼 때 예쁘고 환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고 혼자 쓸쓸하게 놓인 것들에 나를 이입했다. 말하자면 이랬다. 당시에 '카노'라는 이름의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카노는 특이하게 창밖을 보면서 한숨을 쉬는 때가 많았다. 한숨을 푹 쉬고는 느린 동작으로 엎드리며 고개를 창 쪽으로 내놓고 꿈뻑꿈뻑 눈만 껌뻑였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카노의 그 뒷모습을 나도 모르게 오랫동안 지켜보곤 했다. 카노야. 왜 그래. 너도 엄마 보고 싶어? 내가 혼자 말해놓고는 미친년처럼 내가 줄줄 울었다.
해질녘이면 증세가 더 심했다. 노을이 쥐약이었다. 샌디에고는 건조한 날이 많아 하늘이 늘 맑게 트여있었는데, 그날그날의 대기 조건에 따라 주황빛, 핑크빛, 보랏빛 노을이 그 광활한 하늘 가득히 펼쳐졌다. 저녁을 짓다 말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에 이끌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내 가슴이 아프도록 뻐근해졌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고 하늘은 이렇게 막무가내로 찬란할까. 어떤 날에는 해가 질 무렵이면 두려웠다. 또 얼마나 예뻐서 나를 또 얼마나 아리게 하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은 해야지. 일까지 그만두고 집에만 있으면 나는 한숨 쉬는 카노를 쳐다보다가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유학원 일이 어느덧 2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여름과 겨울 시즌을 번갈아 두 번씩 겪으면서 일은 그냥 일대로 돌아갔다. 진상이라고 생각하던 엄마들의 성향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한 방에 만 불씩 이만 불씩 돈 쓴 보람을 느끼게 해주면 그만이었다. 한국 엄마들은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특히 백인 꼬마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자기 아이 사진을 무진장 좋아했다. 교실 앞에서 발표라도 하는 사진을 찍어 보내면 만족도가 치솟았다. 카톡 프사가 당장에 바뀌는 식이었다.
설정인 듯 설정이 아닌 그 장면을 찍으러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학교를 방문해야 했다. 한국 학생이 발표하는 시간에 잠깐 교실에 들어가거나, 하교할 시간에 맞추어 학교 로비나 운동장에 가서 미국 아이들과 장난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학교의 소음, 선생님과 아이들의 눈빛, 교실에서 느껴지는 담당 선생님만의 질서 같은 것들이 내 마음 어딘가를 계속 쿡쿡 찔렀다. 나는 방문객 목걸이를 걸고 눈에 띄지 않게 내 할 일을 다하고 빠르게 퇴장해야 하는데, 어쩐지 자꾸 미련이 남아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기억이 아쉬움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십 대 중반에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지나오느라 교사로서 마음을 다하지 못했던 그때가 나를 자꾸만 멈칫거리게 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올 때쯤이면 그놈의 해가 또 졌고 나는 또 울고... 피폐한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항공권을 끊고 유학원에 휴가를 냈다. 그리고 솔지에게 연락했다. 이번에 한국에 가면 꼭 보자고 미리 날짜와 장소도 정했다.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승무원의 안내 메시지가 귓가를 울렸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틀에 박힌 그 말이 이렇게 감동스러울 일인가. 한국이 두 팔 벌려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떠나고만 싶었던 한국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찾아서 입국장으로 들어가자 한국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그 말소리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눈을 돌리는 곳곳마다 보이는 표지판의 한글도 정겹게만 보였다. 애쓰지 않아도 읽히고 들리는 것들. 이제야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중 나와 계셨던 엄마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다가와 내 허리를 감싸안으면서, '너 왜 이렇게 말랐니'라고 했다. 그 말이 꼭 '울애기 힘들었구나'로 들렸다. 엄마. 드디어 엄마 눈을 보면서 엄마를 소리 내어 부를 수 있었고 엄마를 만질 수 있었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 엄마 보고 싶어서 나 힘들었어. 빨리 우리 집에 가자.
엄마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이 엄마만 쫓아다녔다. 엄마가 요리하고 있을 때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부엌 카운터 탑 한편에 올라가 다리를 껴안고 앉아서 엄마가 밥 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가 나물을 무치다가 비닐장갑을 낀 채로 나물 몇 가닥을 집어서 내 입에 넣어주면 나는 목이 콱 막혀서 나물을 오랫동안 우물거려야 했다. 엄마 집에 살 때는 와서 간 좀 보라고 소리를 쳐도 세상 귀찮은 듯이 털레털레 걸어가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 벌리고 받아먹던 그 나물이 아니었던가. 하찮기만 했던 순간이 이제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져서 나는 엉엉 울고만 싶었다. 미국으로 돌아갈 날을 속으로 초조하게 세어 보면서. 한동안 못 볼 이 장면을 아깝게 쳐다보면서...
며칠 뒤에 솔지와 화성행궁 근처의 이탈리안 음식점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집 근처에서 꽃다발을 사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시내버스를 타고서 행궁까지 가는 동안 익숙한 풍경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와 야자를 튀고서 달려갔던 노래방, 학교 봉사활동 시간에 쓰레기를 줍던 화서공원이 차례로 지나가고 나는 행궁 앞에서 내렸다. 식당을 찾아서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골목 풍경이 어쩐지 눈에 익숙했다. 그 길은 시립도서관과 이어지는 길이었다. 교복 입고 오르던 그 길. 솔지에게 쓴 편지를 가방에 넣고 내려오던 그 길이었다.
그 시절의 내가 꿈꾸던 어른의 모습이 겨우 이거였을까.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잠깐 환해졌던 마음이 다시금 가라앉는 것 같아 불안했다. 얼마 만에 보는 솔지인데...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솔지는 먼저 와 앉아있었다. 나를 보며 반갑게 웃는 솔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냥 너 주고 싶어서 샀어. 솔지가 꽃보다 환히 웃어 보였다. 솔지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잇몸을 내놓고 웃고 있었다.
고심해서 고른 식당이었지만 음식이 뭐가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솔지를 마주 보고 있는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시간이 빨리 지나버릴까 봐 몇 번인가 핸드폰을 열어 확인했었다. 그래봤자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에야 마음을 놓고 솔지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솔지도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우리는 결국 접시마다 음식을 절반씩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로 향했다.
포근한 빛의 무드등이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솔지와 한 시간 넘게 같이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겉도는 이야기만 주고받고 있다는걸. 그 이후에 누가 먼저 진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다만 한 번 물꼬가 터진 이야기에 어느샌가 밖이 어둑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나는 솔지와 친구가 되고 처음으로 그 아이 앞에서 발가벗은 기분으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 나를 포장하기 위해 켜켜이 쌓아왔던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벗어 버리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초라한 내 속살을 솔지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전부 까보였다. 아무리 친구 사이더라도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절대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얘기했다. 가령 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다이아반지 같은 것. 손가락에 덜그럭거리는 그 반지부터 말했던 것 같다.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부터 껴온 반지였다. 내 손가락보다 반 치수가 큰 그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말했다. 결혼하자면서 내 손에 끼워주는데 이게 너무 커서 자꾸 돌아가는 거야. 그때 알았어야 했어. 반지도 이건 네 꺼가 아니라고 말해주는데 나는 손가락 끝까지 밀어 넣고 맞는 척했어. 살찌면 맞겠다 했지. 근데 살이 안 쪄. 아직도 이래. 손가락 주변에서 휙휙 반지를 돌리다가 아예 빼서 셋째 손가락에 끼우니 거기가 오히려 더 잘 맞았다. 여기가 제자리인가 봐. 다이아반지가 더 잘 보이도록 가운뎃손가락을 꼿꼿하게 들어 올리자 솔지가 꺽꺽 웃었다.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내 것이 못 되는 것들은 비단 반지뿐만이 아니었다. 샌디에고의 집, 하고 있던 일, 그리고 남편과 그의 가족까지도... 내 결혼생활과 미국에서의 삶은 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껏 혼자서 생각만 하고 있던 것들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내자 속이 후련함과 동시에 조마조마했다. 솔지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경이 쓰였다.
나는 네가 미국에서 행복한 줄만 알았지.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잖아, 네 사진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네가 부러울걸. 솔지가 말했다. 그 말에 오른쪽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부럽기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은 아닌 척 숨기려고 찍은 사진들에 불과했다. 행복해 보이고 싶어서, 아니 행복하고 싶어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SNS에는 모두가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전시한다고 하지 않던가. 나 역시 그랬다. 노을 지는 하늘 아래서 매일같이 눈물 셀카를 찍어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솔지는 둘째에 대해서 얘기했다. 둘째 아이를 데리고 종종걸음으로 병원을 오갔던 나날들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 연락하지 않았던 그 기간에 내가 몰랐던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극적인 화해를 이루고 그동안 카톡과 보이스톡으로 간간이 소식을 전해왔지만 차마 전화로는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그저 아기가 잠시 앓고 지나간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솔지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둘째 아이와 반 년을 살았다. 아이가 입원해있을 때는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4인실 병실에서 커튼을 치고 그 좁은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둘째가 아픈 것을 제 탓이라고 여기며 자책했다가, 하늘을 탓하며 분했다가, 그 어떤 것도 탓할 수 없었을 때는 아이가 자는 동안 소리 내지 않고 우느라 목구멍이 따끔거렸다고 했다. 아아. 내가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솔지도 어느 터널 안에 갇혀 있었나 보았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커튼을 쳐두고 혼자 숨죽여 울었을 솔지를 상상하면서 휴지에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울고 있는데 솔지는 오히려 덤덤해 보였다.
아현아, 울지 마. 나는 이제 괜찮아. 예전엔 누구 만날 때마다 둘째가 어떤 병인지 막 설명하려고 했거든. 이게 유전이 아니구요,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될 수 있는데 지금 상태는 이렇구요... 아무도 묻지 않는데 내가 막 구구절절 설명인지 변명인지 뭔지, 나도 모르면서 자꾸 말을 하고 있더라구. 상대는 말해줘도 그게 무슨 병인지도 잘 모르고 별 관심 없을 텐데도... 근데 나 지금은 안 그래. 둘째가 벌써 두 돌이 넘었어. 그땐 내가 아픈 아이를 키운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어려워서 그랬나 봐. 조금씩 지나가지더라. 나중엔 커튼도 열고 병실 애기 엄마들이랑 수다도 떨고 웃기도 했어. 병원에서 자주 마주치는 언니랑은 인스타 팔로우까지 했다 야.
해가 지는지도 모르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이 두고두고 나에게 어떤 힘이 되었는지 솔지는 알까. 누가 더 힘든지 내기라도 하듯이 각자의 아픈 시간을 꺼내어 놓고 우리는 서로를 토닥거렸다. 살아가는 게 힘이 든다는 걸 어렴풋하게 알기 시작한 서른이었다. 솔지의 쓰라렸던 기억은 나에게 어떤 안내서 같았다. 내 처지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어설픈 충고도 없이 그저 담백하게, 이제 그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이쪽으로 살살 걸어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솔지가 쥐여준 말들을 마음에 품고서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캐리어 가방을 들고서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나는 결국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집안 곳곳의 모든 것들이 빛을 잃은 채 나를 데면데면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어디에 눈을 맞추려고 해도 내 것이랄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안락함을 느낄 구석이 어디도 없었다. 시댁에서 받은 그림과 도자기, 가구들... 심지어 벽지 색깔까지 내 취향이 없는 그 집은 내가 쉴 곳이 되지 못했다. 도저히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조금은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며칠 뒤에 나는 출근도 못하고 종일을 누워있었다. 물 한 모금도 마실 기운이 없었다. 망할 놈의 해는 또 어김없이 졌고, 새카만 밤에 주방에 기어 내려가서 위스키를 찾았다. 단숨에 반병을 털어마시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소주 한 잔에도 목까지 빨개지던 때였다. 귀에는 내 심장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심장소리 대신 이번엔, 죽어. 죽어. 죽어. 누군가 내 귀에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부엌에서 아무 칼이나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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