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뭐. 두 마디면 될 것을

by 나타날 현



와우. 아침 6시 38분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이 시간에 내가 앉아 있다니. 누워 있을 수 있다면 무조건 최대치로 누워만 있는 내가 앉아 있다.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짓고 싶다. 그 욕심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게 뭐라고 여기에 나를 온통 쏟고 있나 싶다가도 이 덕분에 가을을 즐거이 맞이하고 있는 걸. 그거면 됐다. 글 하나 쓸 때마다 솔지가 나를 부둥부둥 칭찬 감옥에 가둬주는 것도 새벽 기상에 한몫하고 있다. 빨리 또 하나 완성시켜서 짜잔, 보내고픈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


야. 뭐.
이 두 마디면 될 것을 멀리도 돌아왔다. 한참을 둘이서 울다가 또 한참을 꺽꺽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너 왜 전화 안 했어. 너도 안 했잖아. 유치한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우리 사이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무장해제. 솔지 앞에서 더는 숨길 것도 없었다.

솔지가 먼저 담담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둘째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많이 아팠다고 했다.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지금은 통원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평택으로 와주기를 바랐던 건데 거기다 대고 나는 '네 사정이 그렇다면' 따위의 말을 뱉은 것이다. 아아.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옹졸했고 어리석었다. 미안해. 미안해 솔지야 몰랐어. 내 생각만 했어. 한발 늦은 사과는 한없이 경박하게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거야. 솔지가 물었다. 그냥 뭐, 파트타임으로 사무보조 같은 일 하다가 요즘은 유학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냥 그래. 내 일상이 솔지 앞에서 괜히 보잘것없이 느껴져서 말끝을 흐렸다. 잘 됐다! 너 학교 끝나고 뭐 해야 될지 걱정하고 있었잖아. 나도 잊고 있던 걸 솔지가 기억하고 있었다. UC 샌디에고에서 일 년간의 테솔 프로그램이 끝나고 아직 모르겠다고만 말했던 그때를, 막막하기만 했던 그때를 너는 왜 사람 더 미안하게 다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야. 미국에서 일도 하고 멋지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나조차도 나에게 이것밖에 안 되냐고, 이러려고 미국에 있는 거냐고, 이러려고 엄마 마음을 찢어놓고 여기 있는 거냐고... 매일 매 순간 실망하고 있었는데 솔지는 내가 멋지다고 했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고 있음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꺽꺽 울었다. 멋있긴. 나 영어도 드럽게 안 늘어. 어떨 땐 바닐라 라떼 하나 주문하는 데도 아직도 심장이 떨려 짜증 나게. 울먹이면서 얘기하는데 솔지가 깔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그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느껴졌던 나 자신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출근을 하는데 솔지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멋지다.'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그 말을 솔지에게서 듣고 나니까 뭐든 더 용기 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 우버를 타고 샌디에고 다운타운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보던 출근길 풍경이 달라 보였다. 생동감이 넘쳤다. 다운타운에 가기 직전에 보이는 발보아 파크도, 가로수로 서 있는 기다란 팜트리도, 전부 다 싱그러워 보였다. 다운타운 중심가에서 택시에서 내려 We Work 건물로 걸어가는 길도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인 양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침마다 인사를 건네던 똑같은 프런트 직원들마저도 오늘따라 유난히 더 환하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일하고 있던 유학원은 여름, 겨울방학에 맞추어서 말하자면 계절 장사를 하고 있었던지라 시즌을 앞두고 한창 바쁠 때였다. 프로그램 매니저로서 내가 하던 업무는 '미국 썸머캠프', '미국 스쿨링'이라는 이름을 붙인 프로그램을 기획부터 진행까지 하는 일이었다. 말이 좋아서 매니저이지, 프로그램의 시작부터 끝까지 같이 일하던 팀장 언니와 나 둘이서 업무 분담 없이 관련된 모든 일을 전부 다 하는 거였다. 봄, 가을이면 블로그와 카페에 홍보하고 전화 상담을 통해서 등록을 이끌어내고, 여름, 겨울이면 초등학생을 데리고 샌디에고로 오는 엄마들의 공항 픽업부터 아파트 체크인, 렌트카 픽업, 학교와 캠프 등록까지 일련의 정착 과정을 대리해 주는 것이었다.

얼마 후, 한국의 여름방학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엄마들과 아이들이 샌디에고로 몰려왔다. 아침 7시부터 렌트카 업체와 호텔, 아파트, 학교, 캠프 센터를 종종 거리며 돌아다녔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지나갔다. 그러면서 내 영어가 많이 늘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대체해 줄 수 없는 상황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온 덕분이었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되는 영어 안 되는 영어 손짓 발짓 뭐든 해서 돌파하고 나가야 했던 순간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에 땀이 날 때면 솔지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멋지다 김아현.

그 말 하나에 나는 못할 게 없었다. 솔지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상황이든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또 긴장이 될 때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말을 천천히 했다. 그러면 상대방도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무얼 원하는 건지 파악하곤 신속하게 도와주었다.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언어는 그저 도구일 뿐인 것을. 쫄지 말자. 주먹을 꼭 쥐고서 여름을 났고, 별 탈 없이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자축할 새도 없이 다음 겨울 시즌 준비가 시작되었다. 한국 시간에 맞추어 상담을 진행하다 보니 밤이고 낮이고 아무 때나 카톡이 울렸다.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처음 오는 엄마들의 걱정 어린 질문에 답을 해주느라 퇴근 이후에도 핸드폰을 붙잡고 살았다. 한 팀 당 프로그램 비용이 만 불이었다. 4주 체험에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단숨에 결정해서 오는 엄마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 돈값을 하려면 조금의 불안도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어떤 엄마들은 아파트면 아파트, 학교면 학교, 사사건건 질문을 해댔다. 나는 했던 얘기를 또 하고, 엄마들은 똑같은 질문을 다른 걱정으로 또 하고...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도를 넘는 엄마들이 많았다.

한 번은 시댁에 가 있을 때였다. 그날도 하루 종일 전화기가 쉬지 않고 울렸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전화상담 요청이 들어왔다. 하필 한국 뉴스에서 미국의 총기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날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차로 열몇 시간도 더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총기사건이었다. 그 뉴스를 보고 샌디에고의 치안이 걱정된 어떤 엄마가 상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식사 자리를 나와서 통화를 급하게 마무리 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시부모가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 일을 계속하고 싶냐고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멈추는 것 같았다. 뚜렷하게 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어서 한다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하고 있는데, 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이후에도 전화는 끊임없이 울렸지만 받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뭘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장은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저녁 식사 테이블 위에선 미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앞둔 시누이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여느 때처럼 남편과 여동생은 영어로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그날은 유독 어떤 말도 한 번에 이해되는 문장이 없었다. 대화 중간에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자'라던가,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는 식의 말만 또렷하게 들렸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냐고 물어본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머리가 아팠다. 저녁 먹는 동안에 지끈거렸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숨을 고르고 잠에 들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잠은 더 달아나고 생각은 쉬지 않고 나를 채근했다.

그저 나를 증명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남편이 벌어다 주는 생활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하우스 와이프 말고 나도 내 힘으로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구직에 나섰던 건데. 나 자신에게도, 한국에 있는 우리 부모님에게도, 자기 일로 잘 나가는 남편에게도, 그리고 그의 부모에게도 떳떳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정말로. 내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그건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수료한 테솔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일은 결혼과 동시에 일찌감치 포기했고, 그나마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건데 이걸 계속하고 싶냐니. 울컥 솟은 마음이 결국엔 눈물로 흘러나왔다. 엄마가 보고 싶었고 집에 가고 싶었다. 샌디에고 집 말고, 엄마 집...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샌디에고 노을이 슬퍼지기 시작한 게. 미제 하늘은 떼깔도 다르다며 좋아했던 시절은 이미 멀게만 느껴졌다. 해는 하필 매일 뜨고 지는데 나는 해가 질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생각이 나면 입술을 꾹 다물고 눈물을 참았다. 입을 열어 "엄마" 하고 부르고 나면 그칠 수 없을 만큼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우울이라는 길고 긴 터널의 시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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