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결혼, 나의 결혼

by 나타날 현



이왕에 은중과 상연 드라마로 시작한 이야기이니, 드라마 ost를 걸어놓고 시작하련다.


어제 글을 써놓고 솔지에게 링크를 공유했다. 솔지가 잠깐 차를 세워두고 읽다가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그때의 우리가 생각나면서 그 교실이 떠올랐다고. 어렸을 땐 미처 들여다보지 못하고 서로 몰랐던 여러 가지 마음들을 이제서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누군가 나의 모습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해 준다는 것이 감동이고 고맙다고도 말했다. 내가 쓴 글이 당사자에게 감동을 주었다니, 이보다 좋은 피드백이 어디 있으랴. 그 말을 원동력 삼아 계속해서 써나가 보려고 한다. 안 그래도 요즘 찬바람이 슬쩍 불어오면서 뭐라도 끄적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솔지가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가지고 나타난 그 부분.


솔지가 결혼을 한다니. 놀라면서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에 나는 자꾸만 등이 떠밀리는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대학교 친구들 단톡방에는 대기업 취업, 브라이덜 샤워, 프러포즈, 결혼식 같은 단어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에 반해서 내 상황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잘되지 않을 때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겠다고 꿈을 꾼 적도 있었는데 결혼은 나에게 한참 남은 숙제 같기만 했다. 그보다 내 살 길이 막막했다. 첫 근무지에서 2년간의 기간제 교원 계약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사립학교에서 정교사가 된다는 건 교장의 딸이거나 재단 이사장의 조카쯤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란 걸 기간제로 발을 들일 때는 몰랐던 것이다. 순진했다. 누구의 딸도 조카도 아닌 내가 사립학교에 들어가려면 억대의 후원금 정도는 되어야 가능했다. 치사스러운 현실에 신물이 났다. 당시에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마저도 나만큼이나 변변찮게 느껴져서 엄마한테 말조차 못 꺼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솔지가 결혼을 한다니. 너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부케는 내가 받기로 했다. 당장에 결혼할 마음은 없었지만 우리가 친구가 된 순간부터 네 부케는 내 거라며 침 발라 놨으니 내가 받을 수밖에. 솔지의 다른 친구가 받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내가 서운해할 거라는 걸 솔지는 알고 있었다. 결혼식 당일에 새벽부터 미용실에 가서 드라이도 받고 속눈썹도 붙이고 나름의 멋을 부리고 갔다.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솔지 남편을 처음 만났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키가 더 컸고 어깨와 가슴이 떡 벌어진 사람이었다. 그걸로 됐다 싶었다. 저 넓은 가슴으로 우리 솔지를 얼마든지 품어줄 수 있으리라.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데 그 웃는 얼굴이 꼭, 일평생 나쁜 마음이라고는 한 톨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 같았다. 마음이 놓였다.


신부 대기실에서 솔지와 인사를 하고, 축의금 봉투를 꺼내어 가방순이를 해주고 있던 솔지의 고등학교 친구에게 건넸다. 축의금으로 내 인생 최대치의 액수를 넣었다. 편지도 동봉했다. 전날 밤에 강한나 작가의 『우리 흩어진 날들』 속 「우리, 그렇게 결혼하자 –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 몇 구절을 인용해서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적은 편지였다. 교복을 입고 처음 만났던 솔지가 어느새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올라서 편지를 쓰다 말고 몇 번을 숨을 골랐는지 모른다. 이러다 부케 받다가 우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막상 웨딩드레스를 입은 솔지를 보고 있자니 하나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와는 이제 다른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고 있는 친구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붐비고 정신없는 결혼식장에서 내 시간만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웨딩홀의 조도와 소음이 꼭 중3 2학기 말의 교실 풍경 같기도 했다. 솔지랑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는 걸 알고 한 톤은 더 어둡게만 보였던 그 교실. 솔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 입학할 학교를 떠올리며 신이 나 보였다. 자꾸 울 것만 같은데 아니 울고만 싶은데 시간은 졸업식을 향해 저벅저벅 흘러가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땠더라. 솔지가 고등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 미니홈피에 업로드될 때마다 나는 한결 더 울적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친구도 아니고 남편이라니. 그래, 어쩌면 떠나보내기가 더 쉬울지도 몰랐다.


이후에 솔지를 만날 때면 너무나 낯선 단어들이 등장했다. 우선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호칭에서부터 이질감이 들었다. 남편이라는 단어 하나도 낯설어 죽겠는데 솔지 입에서는 시부모님, 시댁, 도련님, 동서 같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익숙해지지 않는 건 말뿐만이 아니었다. 솔지가 이전엔 없던 명품 가방을 들고나오는 날이 더러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명품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솔지 가방에 자꾸 눈이 갔다. '저런 가방은 얼마나 할까' 속으로 딴 생각이 들었다. 솔지는 시부모님과 함께 3층짜리 전원주택에 산다고 했다. 남편은 청년 농부였고, 시아버지와 함께 몇 천 평의 땅을 농사지으며 산다고도 말했다. 그때까지 솔지는 같은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었는데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가 솔지에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진짜 사람 복이 많나 봐."


솔지는 이야기 끝에 습관처럼 이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할 때면 솔지의 얼굴에서 행복이 뚝뚝 묻어 나왔다. 해사하게 웃고 있는 솔지가 드라마 속 주인공 같기만 했다. 현실감이 너무 없어서 나는 되려 부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솔지는 임신 소식을 전해왔다. 내 친구가 결혼했다는 것도 적응이 덜 된 판에, 뭐라고? 임신이라고? 어떻게 축하를 해야 하는지 감도 안 왔다. 결혼 소식도 주변 친구 중에 솔지가 처음이었는데 임신 소식에 나는 벙찌고 말았다. 어머 정말? 축하해! 전화기 너머로 호들갑을 떨다가 통화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솔지에게 편지를 쓰며 야간 자율학습을 했던 그 고등학교에 나는 서있었다. 이번엔 모교에서 기간제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솔지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데 나만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쪼그라들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의 기쁜 소식을 이딴 기분으로밖에 들을 수 없는 현실이 정말이지 거지 같았다. 솔지의 배속에서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나는 축하는커녕 신세한탄만 하고 있는 꼴이라니. 처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박차고 문을 나가고는 싶은데 어느 문을 어떻게 박차고 나가야 이 구렁텅이 같은 기분이 나아지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던 다른 기간제 선생님한테서 유학을 가보는 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내 나이라면 고민도 안 하고 떠날 것 같다고 나를 부추겼다.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경험을 공유해 주며 나에게 지역도 추천해 주고 영어교사들을 위한 자격증 프로그램도 알아봐 주었다. 얼떨결에 내 생에 없던 유학이라는 생경한 단어가 내 머릿속을 온통 장악하고 말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푹 꺼진 땅에서 솟아날 길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솔지가 첫아이를 낳고 그 이듬해에 나는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더럽고 치사한 사립학교 판을 떠나서 비행기에 오르는 길이 어찌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이 거지 같은 것들. 내 현실은 내가 바꾸면 그만이다. 두고 봐라. 야심찬 포부를 안고 샌디에고로 향했다. 하지만 야무졌던 각오와 달리 처음 몇 주간은 잠에 들지 못했다. 불안해서였다. 내가 품었던 꿈을 여기서도 이루지 못하게 될까 봐 매일 밤 기숙사 침대에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계획했던 일 년이 지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겁이 나서 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학교생활이 촘촘하고 바쁘게 돌아갔다.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 속 편했다. 발표와 퀴즈 준비로 늦게 잠들었다가 머리도 못 감고 헐레벌떡 등교하는 날이 많았다. 학창 시절 범생이 기질이 남아 있어서인지 주어진 과제는 끝끝내 성실하게 해냈다. 학교생활을 하며 두루두루 친구들도 사귀었다. 이십 대 중반에 학생 신분으로 돌아오고 보니 못할 것이 없었다. 첫 학기가 끝나고 다음 텀이 오기 전에 친구들과 뉴욕으로, 멕시코로, 여행도 다녔다.


그리고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상대는 한국말을 어설프게 하는 교포였다. 그가 보여주는 미국이라는 세상이 별천지 같았다. 같은 지구상인데도 샌디에고의 하늘과 노을과 바다는 왜 그리도 특별해 보이던지. 아니 특별한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압도 당했다. 미국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옛날 사람들이 왜 미제 미제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늘마저도 미제 하늘은 떼깔부터가 달라 보였다. 그 사람 덕분에 유학생 신분으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현지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구와 견주어 우쭐했던 걸까. 뭐가 그렇게 우월해지고 싶었던 걸까. 내가 떠나온 한국의 모든 것들이 점점 볼품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가 그 즈음부터였다. 솔지를 마지막으로 떠올린 날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다음 해에, 나는 그 교포남과 결혼을 했다.


한국에 잠깐 들어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시절 친구들을 오랜만에 보았고 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물론 솔지도 와주었다. 내가 신부대기실에 있었던 시간을 놓치고 조금 늦게 식장으로 들어왔다. 결혼하는 기분에 취해 있었던 터라 아무렴 괜찮았다. 내 결혼식에 무려 가수 박정현이 와서 축가를 불러주는데 솔지가 신부대기실에서 나랑 사진을 못 찍었다는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나는 세상 부러울 게 없다고 자만에 자만을 했더랬다. 헬조선이란 말이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니 한국을 영영 떠나는 것이야말로 이만한 성공은 없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 영주권이 나왔다. 내 인스타그램 피드는 캘리포니아의 여유로움과 미국 곳곳의 사진들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미국병'이 오지게 온 것이었다.


결혼식 이후 일 년 만에 엄마를 보러 잠시 귀국했을 때는 그놈의 미국병이 극에 달해 있었다. 평생을 한국에 살았으면서 마치 미국이 내 고향이고 한국은 잠깐 여행을 온 것마냥 꼴값을 떨었더랬다. 서울이 번잡스럽고 정신없다며 속으로 흉을 봤고, 판에 박힌 듯 똑같이 생긴 아파트 똑같은 패션 똑같은 삶의 방식들을 측은하다고 여겼다. 말끝마다 "미국은 안 이런데" 따위의 소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꾸만 튀어나왔다.


한국에 오고 며칠 후에 나는 솔지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솔지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카톡으로 말했다. 내가 일 년 만에 돌아왔는데, 잠깐도 시간을 못 낸다고? 마음속에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나에 대한 솔지의 마음이 그 정도뿐이라고 곡해를 했다. 사실은 내 마음이 고작 그것밖에 안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우리 우정의 역사상 최악의 말을 솔지에게 뱉었다.


"네 사정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뭐."


아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쪽팔려서 손가락이 채 펴지지가 않는다. 쪽팔림은 둘째 치고 그 말이 이렇게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서 가슴이 저릿저릿 해질 줄은, 그때는 정말이지 몰랐다.


나는 그 말과 함께 솔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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