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6
가을에는 자발적으로 한낮에 나가 기꺼이 혼자서 걷게 됩니다. 오직 가을에만. 아무래도 가을을 타는 것 같아요. 그림자, 참새 떼가 바람에 우수수 쏟아지는 낙엽처럼 떼로 자리를 옮기는 것,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왜가리, 한적하고 서늘한 골목, 모녀가 듣기 좋게 소녀처럼 깔깔깔 웃는 소리, 서점 안에서 본 긴 곱슬 머리를 하고 고동색 가디건을 입은 근사한 사람, 서점 입구에서 영어로 욕을 계속해서 뱉고 서 있는 사람, 다리 아래를 지날 때 천장에 물빛이 선명하게 어른거리는 광경, 귀여운 새까만 개 두 마리(한 마리는 철물점 앞에 나란히 앉은 아저씨들 곁에서 묶이지 않은 채 뒹굴었고, 나머지 한 마리 역시 줄 없이 대문을 열고 나오는 아저씨 뒤로 조용히 의젓하게 튀어나왔습니다) 등을 구경했습니다. 평소에 나는 거의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으려 집에서만 지내는 편입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심하게 그랬습니다. 미친듯 쏘다니고 싶은 날씨입니다. 가을은 종일 빛의 색이 가슴 저미게 아름답습니다. 밖으로 나가 걸으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실감이 쉽게 납니다. 빛 때문에 모든 게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디든 참여하고 싶어집니다. 오래도록 걷자 몸이 노곤하게 데워져 좋았습니다.
걸으면서 나는, 나의 정신은, 나라는 것은, 존재는 무얼 가슴 깊이 사랑했는지로 나타낼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진 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하고 생각하다가 그땐 더는 내가 아닐텐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생각하다 그럼 나라는 건 뭔가? 생각하다 무얼 가슴 깊게 또 죽어서도 사랑하는가 잃어지지 않는 건 무엇인가 그럼 그게 자신이겠구나 이렇게요. 나라는 건 그 기억일 뿐이겠구나. 그게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에 관해 기억할 수 없으면 더는 내가 아니겠구나, 그럼 그건 죽음일까? 새로운 삶일까? 그러나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보니 그럼 치매라는 슬픈 병은? 그 병에 걸리면 그 사람이 아니게 되나? 뇌 어딘가의 문제라면 다른 몸 속 어느 부분의 문제와 똑같은 것인데 어디 몸이 아프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닌데, 그럼 기억을 잃는다고 자신을 잃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해서 모르겠습니다.
생기지 않을 일이지만 날씨가 오늘 같이 내내 이어진다면 좋겠다는 쓸모없는 말이 미련스럽게 생각나는 서늘하고 투명하고 느긋한, 여유롭고 운치 있는 날씨입니다.